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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bird Apr 21. 2023

이사 100일 돌아보기

부암동 이주기

100이라는 숫자에 큰 의미는 없지만, 그동안의 생활에서는 큰 변화였기에 뭐가 달라졌을까, 떠올려봤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다.

1. 계절을 느낀다

그동안 내 생활은 아파트 14층 집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타고 회사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뒤 또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가는 일의 반복이었다. 퇴근은 정확히 역순이었다. 밖에 비가 오는지 꽃이 피었는지 봄인지 여름인지 알기 어려웠고 사실 알 필요도 없었다. 이사 후엔 현관문만 열면 좋든 싫든 바깥 공기를 접해야 하기 때문에 기온의 변화, 바람의 냄새, 땅의 질감 이런 데 예민해졌다. 꽃과 나무의 상태에 눈이 가고 새소리에 귀가 열린다. 사계절로 순환하며 직진하는 세월(실은 순환으로 은폐된 직선), 엘리베이터-주차장-승용차로 이어지던 아파트 생활 시절엔 어쩌다 한 번씩 봄이구나 가을이구나 뭉텅뭉텅 둔하게 느껴서 잘 알아채지 못 했는데, 지금은 매일 체감한다. 하루하루에 조금 더 감사하게 됐다고 할까.

2. 집에 대한 애착(?)

한겨울에 공사를 마치고 이사하다 보니 단단히 채비할 게 많았다. 다용도실 창문에 뽁뽁이를 붙이고 창틀에 문풍지도 바르고, 수도계량기를 감싸고 보일러 배관에 난방재를 둘러주고 그래도 불안해 아주 춥다는 날엔 수돗물도 졸졸 흘려줬다. 모두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올겨울 첫 한파에 보일러가 얼고 아침 출근길 대문이 통째로 얼어붙어 안 열리는 바람에 펄펄 끓는 물을 들이붓고 가까스로 나오기도 했다. 주택 살이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아파트에선 이렇게 일일이 대비할 필요가 없었고, 일이 터진다 해도 금세 나타나 해결해주는 방재실도 있었다. 편했지만, 그래서인지 ‘집을 살핀다’는 느낌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주택은 하나부터 열까지 내 책임이다 보니, 그래서 노심초사하며 구석구석 살피다 보니 어느 순간 집이 마치 강아지처럼 내가 돌봐줘야 할 ‘생명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 내가 월동 준비를 단단히 해주지 않으면 우리 집이 춥겠구나, 비 오는데 배수구 정리를 해주지 않으면 우리 집이 젖겠구나 이런 기분 말이다.

3. 비교에서 벗어났다

이 동네는 얼마짜리, 나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얼마짜리라는 ‘레떼르’에서 자유로워졌다. 의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아파트는 시세가 얼마인지 이따금 궁금했다. 당장 이사할 것도 아니면서 값이 오르면 우쭐해졌고 떨어지면 화가 났다. 주변 다른 아파트가 얼마인지도 궁금했고 왜 내 집보다 비싼지 샘나고 억울하고 그랬다. 저 멀리 강남 아파트 값을 보면서는 아, 나는 이번 생엔 여기서 끝인가 절망도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끊임없이 의식하고 비교하고 조바심을 내며 살고 있었다. 이사하고 나니 비교에서 벗어나게 됐다. 동일한 조건의 물건이 여럿 있어야 시세라는 게 생길텐데 주택은 애초에 백이면 백 크기도 다르고 품질도 다르고 입지도 다르고 조건도 다르니 비교 자체가 어렵고 별 의미가 없다. 대신 동네 구경을 하며 이 집은 이게 좋네, 저 집은 저걸 참 잘 해놨네 발견하는 재미가 생겼다. 주변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직적인 삶에서 수평적인 삶으로 바뀌었달까. 아직까진 기분 좋은 변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4. 내가 먼저 해야 하더라

주택에 살기로 한 사람 대부분이 <응답하라 1988>처럼 동네 이웃과 늘 사이좋게 어울리고 서로 돕는 풍경을 꿈꾼다. 옆집 아이 불러다 밥도 먹이고 강아지도 며칠씩 돌봐 주고.. 나도 그랬다. 이웃에 또래가 살았으면 좋겠다, 동호회라도 만들면 어떨까. 100일의 생활에서 얻은 결론은..내가 먼저 찾아다니지 않으면 아파트보다 못하다는 것. 아파트에선 하다못해 엘리베이터에서라도 이웃을 마주치며 인사라도 주고받게 되지만 여기는 대문 닫고 들어가면 그것으로 끝이더라. 어떻게 생긴 사람이 뭘 해먹고 사는지 집 안에 가만 앉아있으면 도통 알 길이 없다. 요즘 세상에 새로 이사 왔다며 무작정 초인종 누를 수도 없었다. 골목에서 마주치면 먼저 인사하자 마음먹었다. 우리 골목 끝에 정원을 너무나 예쁘게 가꿔놓은 집이 있다. 늘 궁금했는데 어느 날 마당에서 빨래 널고 있는 할머니가 보여 내 성격과는 참 다르게 멀찌감치에서 꾸벅 먼저 인사했더니 갑게 다가오시더라. 새로 이사 왔다고 하니 엄청 반가워하며 이것저것 동네 이야기도 해주고, 차 마시러 놀러오라고 하신다. 이렇게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거구나. 좋은 이웃을 꿈꾼다면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하는 거였다.

#단독주택 #부암동 #이사100일 #가가린 #수직에서수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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