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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bird Sep 01. 2021

느슨하고 긴 인연

평소 크게 의식하지 않고, 따로 연락하고 지낼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지만 의외로 긴 세월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일상생활 루틴의 길목 길목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나에게는 한 달에 한 번 가는 미용실, 단골 치과가 그렇다. 


치과 원장과의 인연은 벌써 20년 가까이 되어 간다. 사회부 시절 알게 된 시민단체 간사의 남편이다. 어릴 때부터 성한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치과를 달고 살아 그 처참한 입 속을 여기저기 보여주기도 싫었던 데다 그래서 더욱 치과는 단골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화곡동에서 시작해 광화문까지 치과가 옮길 때마다 계속 따라다녔다. 의자에 앉으면 원장이 들고 나오는,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노란색 내 차트엔 나는 진작 잊어버렸을 그동안의 오랜 치료기록이 손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다.  


단골 미용실의 원장도 알고 지낸 지 이제 7~8년은 족히 된다. 여의도 회사 근처에서 우연히 찾아간 그 집에서 머리를 자르고 오면 늘 반응이 좋았다. 이후 회사가 상암동으로 옮겨갔고 자연스럽게 발길이 끊어졌는데 4년 전 어느 날 합정동에 개업했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번호로 일괄 전송한 문자겠지만 어쨌든 반가운 마음에 찾아갔고 그 덕에 다시 인연이 계속되고 있다. 결혼식 날 모친 머리도 맡겼고, 이제 아내도 함께 다닌다. 서울 나들이 온 장모님도 평생 안 해본 머리를 그 집에서 처음 시도해보셨고, 근처에 사는 회사 선배도 소개받아 가보더니 만족하며 단골이 되었다. 


매일 보고 속 터놓는 사이는 아니지만 결코 짧지 않은 인연이다 보니 서로에게서 시간을 읽는다. 미용실 원장은 힘없이 처지는 머릿결과 슬슬 비어 가는 속 머리를 다듬으며 내 나이 듦을 느낄 것이고, 치과 원장도 자신이 채워 넣었지만 이젠 오래되어 떨어진 보철을 다시 치료하며 세월을 가늠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 며칠 전 임플란트를 문의하러 간 날, 원장은 시술 위치가 실패할 확률이 꽤 있다며 옛날 사람인 자신보다는 대학병원이나 전문병원에 가보라고 솔직하게 권유했다. 이분도 나이가 드셨구나. 난 못 고치는 게 없는 분인 줄 알고 살았는데.. 저녁에 만난 미용실 원장은 코로나로 타격은 있지만 그래도 원장으로 개업한 이후 직원 한 명 내보내지 않고 잘 버티며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언젠가 자신의 숍을 여는 게 목표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 즈음 결혼하고 낳은 딸은 벌써 내년이면 초등학교 입학이라고 한다.  


문득 이런 인연의 끝을 생각한다. 내가 먼 곳으로 이사를 가 더 이상 가지 못하는 날이 올 수도 있고, 치과 원장이 은퇴하는 날도, 미용실이 옮기거나 문을 닫는 날도 언젠가 오겠지. 어느 한쪽은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닥치는 이별은 어색하다. 그런 날이 왔을 때 어떤 기분이 들까. 내가 그들에게 전화라도 먼저 걸어볼 수 있을까. 그동안 고마웠다고. 


돈을 내고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받는 관계에 큰 의미 둘 것 있냐고 묻는다면 별로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면 입맛이 좀 텁텁할 것 같다. 가게로, 병원으로 내가 들어설 때 그분들이 내 얼굴에서 그저 만 원짜리 지폐만 떠올릴 것 같진 않으니까. 귀한 인연은 내가 먼저 귀하게 지켜야 유지될 것이다. 다음 달 머리 자르러 갈 땐 시원한 아메리카노라도 한 잔 사들고 들어가야겠다. 내가 먼저 인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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