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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bird Feb 09. 2022

<차별 금지, 넌 빼고?>

(방송국에 살다보면)

<차별 금지, 넌 빼고?>


2013년 5월 <시사매거진 2580> 한 기사의 제목이다. 고민 끝에 이 제목을 뽑았다. 짐작이 가듯 차별금지법에 관한 기사였다. 발의된 법안에 성소수자가 포함된 걸 놓고 개신교가 반발해 국회의원실에 전화 폭탄을 쏟아부었고 결국 암초를 만났다.. 뭐 이런 내용. 그때나 지금이나 논란의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후배가 이 아이템을 다루겠다고 했고 나는 담당 데스크였다. 방송 후 벌어질 일이 대충 예상되는 소재였던 만큼 두 사람 모두 결의를 다졌다. 그런데 전쟁은 방송이 되기도 전부터 시작됐다. 그것도 내부에서. 최종 출고권자인 당시 부장이 기사에 문제가 있다며 우리 둘을 호출했다. 어느 정도 각오했던지라 후배와 반박 논리를 나름 만들어 회의실로 갔다.


의외의 일격이었다. 미혼모가 취업할 때 겪는 차별을 소개한 사례가 있었는데 이 부분을 들어내라는 거였다. 오히려 성소수자 부분은 자기는 상관없다고 했다. 원래 그렇게 태어난 건데 인정해야지 어쩌겠냐며. 그런데 미혼모는 다르단다. 그분이 댄 이유를 나는 지금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한다. “부정한 일을 저지른 정숙하지 못한 여자는 차별 받아야 마땅하다.” 말문이 막혔다. 말이 되느냐, 그리고 미혼모가 혼자 애를 낳진 않았을 거고 마땅히 미혼부(또는 유부남)도 있을 텐데 이 사람들은 괜찮냐고 했더니 남자는 괜찮단다. 심지어 “이 땅에선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처녀가 애를 낳으면 돌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마치 전래동화 들려주듯 태연하게 늘어놓았다.


회의실은 난장판이 됐다. "부장은 지금 밖에 나가 거리에서도 이런 이야기 당당하게 할 수 있냐".. "너희만 양심 있냐 나도 양심 있다, 이대로는 못 나간다".. 고성이 오가고 휴전과 재격돌이 수차례. 방송 시간은 다가오고, 결국 인터뷰를 몇 개 들어냈다. 기사가 통째로 불방되는 것보다는 어쨌든 나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후배와 나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 시절 부장과의 마찰은 다반사였지만, 이 때 더욱 마음이 무거웠던 건, 기사를 놓고 입씨름을 하는 동안 ‘누구는 넣고 누구는 빼는 차별'에 어느새 나도 가담하고 있었다는 죄의식 때문이었다.


선거철이 왔고 다시 이 문제가 떠올랐고 또 한 번 이상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야당 대변인이 얼마 전 TV에 나와 자신들의 선거 캐치프레이즈인 ‘약자와의 동행’에 성소수자를 넣을 건지 뺄 건지는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이 결정할 거라고 말했다. 며칠 후인 오늘 아침에는 여당 싱크탱크에서 ‘성적 지향과 정체성’ 부분은 빼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방안을 검토중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논란이 커질 부분은 빼고 일단 이슈를 선점해 '차별화'를 꾀해야 한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이런 것도 소위 ‘개문발차’해야 할 사안인가.  


어떤 이유로든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원칙과 상식을 무려 법으로 만들자면서 예외를 두는 게 앞뒤가 맞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예외를 두는 순간 차별금지법 자체가 ‘차별받아 마땅한 사람’을 애초부터 낙인찍고 출발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안 하는지 궁금하다. ‘사회적 합의’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내가 남자 또는 여자로 태어난 게, 흑인 또는 백인으로 태어난 게 다른 사람의 ‘동의’를 받아 이뤄진 결과가 아니듯, 차별 여부는 ‘합의’할 내용이 애초에 아니지 않은가. 너랑 나랑 합의하면 저 사람은 차별해도 된다는 뜻인가. ‘동행할 사회적 약자'의 명단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성소수자를 여기에 넣을지 뺄지를 선대위원장이 결정한다는 발언은 더 황당하다. 선대위원장이 조물주인가. 사회적 약자를 자기가 결정하게.


나는 차별금지법이 지나치게 구체적일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소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내용이더라도 대한민국에는 이런 법이 있고, 그래서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말하고 행동할 때 한 번 더 생각하고, 그래서 이 나라가 조화로운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점점 올라가도록 기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적용 범위에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미혼모든 성소수자든, 차별 금지법이라는 이름으로 더 큰 차별을 제도화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함께 가자면서 ‘넌 빼고’라니, 무섭고 슬프지 않은가.


(오늘 저녁 성소수자 제외한 차별금지법 관련 보도는 사실무근이라고 여당이 밝혔다. 다행이다.)


                                                                              202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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