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나를 붙잡던 시간
퇴사 후의 나는, 생각보다 오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몸은 나왔지만 마음은 아직도 그 사무실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는 듯했다. 문을 닫고 나온 내가 더 가벼워질 줄 알았다. 숨이 트일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현실은 그 반대였다. 퇴사 후의 며칠 동안 나는 끝없이 나를 추궁했다.
내가 조금만 더 잘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내가 놓친 신호가 있었던 건 아닐까?
왜 나는 더 빨리 벗어나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까지 참고, 견디고, 스스로를 갉아먹었을까?
질문은 반복 재생됐다. 마치 재난 상황을 되감아보는 CCTV처럼, 같은 장면만 수백 번 돌려보며 스스로를 고문했다.
나는 커튼을 닫아 걸었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빛조차 나를 향한 비난처럼 느껴졌다.
불도 켜지 않은 방에서, 이불 속에 파묻혀 하루를 버티는 일조차 벅찼다. 씻지 않았고, 제대로 먹지도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몸이 아니라, 움직일 의지가 사라져버린 나였다.
그렇게 이불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나는 계속해서 나를 학대했다.
‘내가 무능했기 때문이야.’
‘내가 너무 순해서 당한 거야.’
‘나는 왜 늘 이런 식일까.’
누구도 나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이지 않았는데, 정작 나는 나에게 가장 잔인한 가해자였다.
돌이켜보면, 내가 미련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떠났기 때문이었다.
상처는 아물기 직전에 가장 시리다. 그래서 그때의 기억이 유독 선명하게 떠오르고, 놓아야 할 것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 모두는 다치고 나면 본능적으로 그 자리를 들여다본다. 얼마나 찢겼는지, 왜 이렇게 됐는지, 다시 다치진 않을지 확인하느라 멍하니 상처만 바라본다.
나는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떠난 뒤에도 계속해서 상처를 만지작거리며 아픔을 재확인했다.
그걸 미련이라고 착각했지만, 사실은 회복 과정이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거기서 빠져나왔으면 됐지, 왜 자꾸 돌아보냐고.”
하지만 상처란 원래 그런 것이다. 쉽게 잊히지 않는다.
상처가 남긴 흔적을 이해해야 비로소 앞으로 걸을 수 있다.
나는 참 미련한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미련은 내가 바보여서 생긴 감정이 아니었다는 걸.
그건 “그때의 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이었을 뿐이다.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다.
그 시절의 내가 허약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래 버틴 끝에 비로소 쓰러졌던 것뿐이라는 사실을.
버틴 사람만이 무너질 수 있다. 그리고 무너진 사람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러니 그때의 나에게 이제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미련했던 게 아니라, 상처가 깊어서 시간이 더 필요했던 거야.”
그 어떤 회복도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생각보다 돌고 돌아 치유가 온다.
그리고 나는 그 긴 시간을 통과하며 조금씩 배웠다.
자책은 치유가 끝날 때까지 따라붙는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림자가 있었다는 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걸.
그렇게 나는 오늘도 아주 작은 한 걸음을 내딛는다.
더 이상 그때의 나를 미련하다고 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