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말고 실행

계획된 우연을 믿어보자

by 최용

어제는 코칭심리사 자격을 준비 중인 수련 선생님들의 모임이 있었다. 야간 대학원을 함께 다닌 동기들이기도 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학원을 다니는 피곤하고 힘든 시간을 함께 견뎌낸 동지들이기도 하다. 동기들 중 나와 한 선생님은 석사 졸업 즈음에 2급 자격에 도전해 바로 자격을 얻었고, 현재는 1급을 준비 중이다. 다른 선생님들은 이제야 2급 자격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2급을 준비 중인 동기들은 자격을 미리 딴 나와 다른 한 선생님을 이구동성으로 부러워하며, ‘진작 할걸 그랬다’며 웃픈 후회를 털어놓았다.
그들의 때늦음에 대한 아쉬움은 사실 두려움과 불안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각자의 상황과 성향이 있었겠지만, 두려움을 떨쳐내고 한 발을 내디딘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2년이 지난 지금 참 많은 차이를 만들어냈음을 실감한다.

한국심리학회에서 관리하는 다양한 자격이 그렇듯, 코칭심리사 자격은 긴 수련 시간과 철저한 점검을 요구한다. 코칭심리사 2급의 경우, 100회기 이상의 코칭을 진행해야 하고, 그중 10회기 이상은 ‘수퍼비전’이라 불리는 전문가 점검을 받아야 한다. 심리학 기반의 코칭을 낯선 이에게 진행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코칭을 믿고 맡길 피코치를 찾는 것도 어렵지만, 막상 피코치를 만났다고 해도 그들을 실제로 코칭하는 일은 또 다른 도전이다.

코칭은 피코치가 목표하는 변화를 실현하도록 돕는 과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코치는 현실의 불편함 때문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막연한 느낌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는 잘 모른다. ‘왜 변화해야 하는지’조차 선명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런 피코치를 전문가로서 섬세하게 서포트하며 코칭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내 서툰 코칭이 오히려 피코치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래서 수련 과정의 첫 발을 내딛지 못하고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설령 첫 발을 내디뎠다 해도 또 하나의 큰 벽이 있다. 바로 수퍼비전이다. 수퍼비전은 수련 과정의 필수 관문으로, 경험 많은 전문가에게 자신의 코칭을 점검받는 시간이다. 어려운 케이스에 대한 조언을 받기도 하고, 나의 코칭 방식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간이 두려워 중도에 멈추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오랜 시간 코칭을 해 온 전문가들, 대부분 교수님들이 수퍼바이저로 참여한다. 이들의 피드백은 날카롭고 냉정하다. 수퍼비전을 마치고 나면 마치 모두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 정도다. 특히 수퍼비전 중 한 번은 반드시 학회원들이 다수 모인 장소에서 공개 수퍼비전 형식으로 받아야 하기에, 더더욱 대중 앞에 서는 두려움을 견뎌야 한다.

때로는 수퍼비전을 받기 전에 나 스스로의 검열에 걸려 버리기도 한다. 수퍼비전을 받으려면 코칭 상황의 녹취록을 정리해 제출해야 한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까지 “왜 그랬는지”,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받게 된다. 녹취록을 정리하며 내 코칭 녹음파일을 다시 듣는 순간, “내가 이랬다고?” “정말 내가 이렇게 했다고?” 하며 부끄러움과 실망이 몰려온다. 자기효능감은 떨어지고 자존감은 바닥을 친다. 결국,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져 수퍼비전을 받으러 가지 못하기도 한다. 이렇게 첫 발을 내딛지 못하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는 불안과 두려움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커리어 코칭을 하다 보면 이와 같은 상황을 자주 접한다.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좋아하는 걸 몰라서, 하고 싶은 건 어려워서, 이런저런 이유로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럴 때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는 개념이 바로 ‘계획된 우연 이론(Planned Happenstance Theory)’이다. 심리학에서는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와 행동하게 만드는 요인을 설명하는 여러 연구들이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이 이론을 가장 좋아한다.

‘계획된 우연’이라니, 언뜻 모순처럼 들린다. 우연이 어떻게 계획될 수 있을까? 계획된 게 어떻게 우연일까? 존 크롬볼츠(John D. Krumboltz)가 제안한 이 이론은, 계획과 우연의 만남이 어떻게 개인의 성장과 진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크롬볼츠는 많은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사건과 기회를 통해 진로를 결정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우연한 만남, 사건, 환경적 변화가 개인의 성장에 긍정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계획된 우연’이라 불렀다. 즉, 우연은 피할 수 없는 변수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만나고 활용해야 할 기회라는 것이다.

계획만 세우고 머뭇거리지 말고, 일단 행동하라는 것이 핵심 메시지이다. 이 이론은 요즘 기업에서 자주 쓰이는 애자일(Agile) 방식과도 닮아 있다. 먼저 시행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개선해 나가는 방식이다. 계획만 세우며 완벽을 기다리기보다는, 해보면서 배워 나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크롬볼츠가 쓴 『더 빠르게 실패하기』라는 책에 등장하는 도자기 만들기 사례는 이 메시지를 잘 보여준다. 어느 도예 선생님이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1번 그룹은 한 학기 동안 도자기를 50개 만들면 A를 주고, 40개를 만들면 B를 주겠다고 했다. 반면 2번 그룹은 만든 도자기 중 최고로 잘 만든 작품 하나로만 평가를 받게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최고의 작품은 예상대로 양으로 평가받기로 한 1번 그룹에서 나왔다. 여러 개를 만들면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실수를 반복한 경험이 실력을 키운 것이다. 반면 질 중심의 2번 그룹은 완벽한 한 점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머물러 계획만 세우다 결국 다양한 실전 경험을 쌓지 못했고, 대부분의 학생이 학기가 끝날 때까지 도자기를 몇 점조차 완성하지 못했다.

우연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우연을 만나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한다. 행동해야만 새로운 만남과 기회가 찾아온다. 두렵고 불안하더라도 우리가 한 발 내디뎌야 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멋진 계획이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종이 위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는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불완전한 시도를 통해 성장한다. 지금 당장은 서툴고 두려워도 좋다. 한 발만 내디디면 된다. 그러다 보면 예상치 못한 우연들이 찾아오고, 그 우연들이 나를 만들어 준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다짐한다.
계획만 하지 말자. 실행 해보자.
우리를 진짜 성장시키는 것은 언제나 계획이 아니라 실행이니까.

keyword
이전 03화퇴사 말고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