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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다 May 31. 2020

책임이라는 말의 무게

최소한의 배려

얼마 전 아빠의 회사 창고 구석에 길고양이가 새끼 네 마리를 낳았다. 새끼 고양이들이 꼬물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너무 귀여워 한번 쓰다듬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하지만 길고양이들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고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특히 아직 어미 품에 있는 새끼들은 사람 손을 타는 순간 어미에게 버려질 수도 있다고 한다. 내가 새끼 고양이들을 만지지 않는 건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하며 참기로 했다.


나는 동물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싶은 소망이 있다. 어릴 땐 부모님이 털을 문제 삼아 강아지나 고양이를 허락해주지 않으셨고 여전히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내가 집에 데려온 동물들은 얼마 못가 다 죽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학교 앞에서 한 마리에 오백 원씩 팔던 병아리는 내 용돈으로도 데려올 수 있었다. 작은 상자에 빽빽이 들어가 삐약거리던 노란 병아리들 중에서 튼튼해 보이는 놈들로 고르고 골라 두 마리를 봉지에 담아 신나게 들고 왔었다. 상자를 주워다 집을 만들고, 폭신한 솜을 깔아주고, 또 무엇을 넣어줄까 고민하다가 사과 모양 반짇고리를 비워 거울을 놓아주었다. 밤새도록 삐약거려도 그 소리가 마냥 듣기만 좋았다. 수업이 끝나면 득달같이 집으로 달려와 병아리들을 작은 상자에서 꺼내 자유롭게 방 안을 누비도록 풀어주고는 그 모습을 그냥 보는 것이 좋았다.


불과 며칠 후, 집으로 들어섰을 때 병아리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방에 들어가 보니 상자 안에서 병아리들은 부리가 부러진 채 죽어있었다. 거울을 쪼다가 죽은 것인지, 몸이 약해 죽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병아리를 손에 품고는 엉엉 울었다. 그리고 집 앞 공터에 정성스럽게 묻어주었다. 무덤을 다시 파보기도 하고 매일 같이 들여다보며 힘들고 긴 작별을 했는데 얼마 뒤, 그 공터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나는 큰 충격 속에서 또 한 번 오열을 했었다.


다음에 데려온 메추리 두 마리도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몇 마리의 병아리와 몇 마리의 메추리를 잠시나마 키웠고, 또 모두 죽었다. 


새를 가졌던 적도 있었다. 어디서 얻은 새였는지 아빠가 어느 날 집에 앵무새 두 마리를 가져왔다. 내 방에서 키우겠다고 떼를 써 들여놓았는데 밤새도록 울어대는 데다 냄새까지 심해 엄마는 결국 새장을 밖으로 내어놓았다. 어느 날 아침, 엄마는 화단에 죽어있는 새를 발견했다. 한 마리는 사라졌고, 한 마리는 죽었다. 아마 주택가 담벼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길고양이들의 짓일 거라 추측할 뿐이었다. 


자라도 키웠던 적이 있다. 사실 자라였는지 거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빠는 자라는 잘 죽지 않는다고 했다. 사는 동안에는 어항 안에서 평화로웠을 것이다. 밥도 잘 주고, 물도 잘 갈아주었는데 그때 내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빠에게 자라를 풀어주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집 근처 산에 있던 계곡으로 들고 가 풀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산에 있는 계곡에 풀어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유를 주겠노라 큰 맘먹고 보내준 그 자라도 분명 얼마 못 가 죽었을 것 같다.


학교 앞에서 사 온 병아리를 키우다가 닭이 되었다는 어디 사는 누구 이야기도 들어 보았고, 고양이 몇 마리를 키운다는 집사도, 십 년 이십 년씩 반려견과 함께 자라온 누군가도 있었다. 내게는 내내 부러운 남의 이야기. 여전히 거리에서 만나는 길고양이들이나, 길을 가다 쇼윈도에 보이는 작은 강아지들을 만나면 그냥 데려갈까, 하는 생각이 솟구친다. 그럴 때면 한 번 더 생각한다. 내가 책임지지 못한 많은 작은 생명들을 떠올릴 때면 책임이라는 말의 무게가 새삼스레 느껴진다.


구석에 자리 잡은 고양이 가족이 안전하게라도 그곳에 오래 머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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