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으로라도 살포시
왜 코끼리를 좋아해?
나의 작은 집에는 코끼리가 가득하다. 동화책은 물론이거니와 발 매트, 시계, 인형, 쿠션, 그림, 마그네틱, 서랍에 들어있는 클립, 선반에는 각기 다른 코끼리들이 즐비하게 놓여있고, 그 수는 여전히 늘어나는 중이다. 왜 코끼리를 그리도 좋아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처음부터 설명하자면 내 나름의 치부를 꺼내야 했기에, 이야기를 잘라내 어느 동화책에서 본 코끼리 때문이라고 간단히 설명을 마치곤 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늘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고, 때로는 주변의 말에 휩쓸려 행동하기도 해서 엄마는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의 영향을 쉽게 받는 학창 시절의 나를 걱정하기도 하셨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원만했기 때문에 문제를 겪어본 적이 없었던 내게도 어딘가에서 한 번쯤은 들었을법한 이야기가 생겼다.
아주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 멀어지게 된 것이다. 어떤 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너무 짧은 시간 안에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것을 계기로 나를 둘러싼 뜬소문들이 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떨떨한 채로 그런 상황을 마주하니 어찌 대처할 수가 없었다. 친구를 붙잡고 나한테 무엇이 화가 났는지 묻기엔 이미 그녀는 너무 차가워져 있었다. 내가 어떤 잘못을 한건 지도 모른 채로 이미 풀어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이런 어려움에서는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몰라 우울감에 빠져버린 시간이었다.
혼자인 시간이 많아졌다. 그날도 혼자였던 날들 중의 하루였다. 수업을 마치고 근처에 있는 대형 서점으로 갔다. 내가 아는 한 서점은 혼자인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그날따라 어린이 서가를 서성이며 훑던 내 눈에 초록색 코끼리가 그려진 동화책이 들어왔다. 그렇게 코끼리와 나는 처음 만났다. 내 편은 없다고 생각했던 그 절망의 순간에 외로운 코끼리가 내게로 왔다.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회색이 아닌, 초록색이기 때문에 따돌림을 받는 작은 코끼리, 온몸에 회색 물감을 칠해도 봤지만 결국 들통이 나고, 결국엔 위험에 빠진 코끼리들을 구해주며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는 짧은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이 핑 돌면서도 더 이상은 울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나에게서 떠나가며 내가 느낀 감정은 절망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나는 그 친구가 돌아오기를 더 이상 바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 그 책을 사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 적이 많았다. 나중에는 구하려고도 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연의 순간으로 더 오래 기억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코끼리 이야기를 읽고 난 후로는 거짓말처럼 조금씩 마음이 나아졌다. 초록 코끼리가 해피엔딩이었던 것과는 달리 그 친구와는 영영 멀어졌지만 더 이상 나를 떠난 친구 때문에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혼자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이런 게 외로움인가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혼자인 내 하루하루는 꽤 괜찮았다.
그때부터였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올랐던 것도. 위로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따뜻했다. 어느 누군가의 마음도 짐작할 순 없지만 나의 이야기로 마음을 만져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은 코끼리가 내게 다가왔듯이 우연으로라도 살포시 당신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스미는 글을 쓰고 싶다.
언젠가 내 이야기를 세상에 꺼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첫 이야기는 내 안에 품고 있던 코끼리를 내어놓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내게 와 위로가 된 작은 코끼리를. 요세프 빌콘의 초록 코끼리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