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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다 Mar 05. 2020

아빠의 저금통

가난하지만 낭만이 있던 밤

아빠는 나름의 로맨티시스트이다. 계획했던 이벤트들이 성공한 적은 드물지만 말이다. 언젠가 엄마와 아빠가 함께 속했던 동호회 사람들 앞에서 차 트렁크에 꽃을 가득 담아 엄마의 생일을 기념했다가 엄마는 질색을 하며 집에 들어왔고, 의미심장하게 엄마와 떠난 여행길에 묵으려 예약한 월풀이 딸린 펜션에서는 바퀴벌레들과 밤을 보내야 했다. 그날 엄마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돌아오는 길 내내, 돌아와서도 한참을 투덜거렸다.


그래도 아빠가 멋지게 성공한 이벤트가 하나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안방에는 나무로 만든 장롱이 있었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장이었는데 내 머리띠가 그 밑으로 굴러 들어갔다. 거실에서 빨래를 개고 있던 엄마를 두고 나 스스로 꺼내보겠노라 신발장에 걸려있던 얇은 대나무 회초리를 꺼내 들고 좁은 틈 사이의 장롱 밑을 휘적거렸다. 한참을 휘적여도 머리띠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바닥에 머리를 바짝 붙이고 눈을 얇게 떠봐도 캄캄한 장롱 아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포기할까 하다 마지막으로 휘적거린 회초리에 만 원짜리 한 장이 걸려 나왔다. 일주일에 오백 원, 천 원 하는 용돈을 받고 있던 터라 만 원짜리는 만져보지 못한 액수였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공짜로 얻어걸린 지폐 한 장에 숨을 죽이고는 얼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나는 콩콩 뛰는 마음으로 몇 차례 막대를 다시 휘휘 저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내 손짓 한 번에 돈뭉치들이 걸려 나오기 시작했다. 만 원짜리는 물론 수표도 나왔다. 그때까지 꺼내 돈을 세어보니 30만 원 정도가 되었다.


그쯤 되니 무서웠다. 꺼낸 돈을 들고 거실에 있는 엄마에게 갔다. 나는 주머니에 쑤셔 넣은 만 원짜리 한 장까지 꺼낼 수밖에 없었다. 엄마와 나는 장롱 앞에 쭈그리고 엎드려 번갈아가며 휘휘 손을 저었다. 지폐 뭉치가 잇따라 나왔다. 끝없이 나오는 지폐들과 한참을 씨름하던 엄마는 결국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좀 일찍 들어와요. 장롱을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아.”


엄마는 아빠가 들어오기 전까지 좌불안석이었다. 당시는 희대의 탈옥범을 붙잡지 못해 언론이 시끄럽던 즈음이었다. 이렇게 많은 현금을 손에 쥐고 있어 본 적이 없는 엄마는 불안에 떨었고 덩달아 나도 그랬다. 엄마는 꺼낸 돈을 아빠가 올 때까지 이불 밑에 넣어두었다. 퇴근하고 집에 온 아빠는 이상하리만치 덤덤해 보였다. 아빠는 장롱을 천천히 들어 살짝 밀어냈다. 가리어졌던 어둠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꺼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지폐들이, 색 바랜 돈들이 온갖 먼지와 뒤엉켜 있었다.


우리 집은 목돈을 만질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아빠는 어려웠던 적이 더 많았다. 그래서 엄마는 더 아껴야 했고, 덜 써야 했다. 그런 아빠가 어느 날 술 한 잔을 하고 오면 만 원, 술값을 내지 않아도 됐던 날이면 삼 만원, 또 수금이 잘 된 날이면 간혹 수표를 넣을 수 있는 날도 있었다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면 엄마를 놀라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한 장, 두 장씩 장롱 밑의 먼지들과 뒤엉키도록 십여 년이 넘도록 비밀스럽게 모아 온 돈이었다.


그날 우리 가족은 밤늦도록 지폐들을 세었고, 그 액수는 깜짝 놀랄 만치였다. 아빠는 멋쩍게 웃었다. 우리는 울다가 웃다가, 집에 돈을 쌓아두고 살아도 무섭겠다며 함께 웃었다.


그 후로 아빠는 해마다 판자에 못을 박아 커다란 나무 저금통을 만들었다. 그리고 저금통을 방 한구석에 두었는데, 누구도 저금통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저금통은 아빠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한 해의 마지막 밤이면 온 가족이 거실에 둘러앉아 저금통을 깨는 의식을 치렀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기다리는 연례행사였다. 아빠는 오래도록 저금통을 채웠다. 아빠가 저금통에 채운 것이 단지 구깃한 지폐만이, 색 바랜 동전만이 아니었음을 안다.


가난하지만 낭만이 있던 밤. 해마다 우리의 12월 31일만큼은 가장 따뜻한 겨울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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