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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다 Mar 13. 2020

이제는 엄마가 웃는다

사실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누구나 그런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때 우리 집은 ‘누구나’에도 ‘그런’ 집단에도 속할 리 없다고 생각했고, 절대로 속하고 싶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때를 그렇게 기억하는 걸 보면 나는 생각보다 어리지 않았나 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자식이라는 이유로 나는 세상의 많은 모진 것들을 모른 채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 시절

아빠의 회사는 부도를 피하지 못했고, 엄마는 빈 지갑을 채우느라 휴대폰 충전기를 조립하는 공장에서 일하며 손에 굳은살이 박일 무렵 나는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댔다. 엄마는 아침마다 언니와 내가 학교에 다녀와 먹을 간식을 식탁 위에 차려두고, 냉장고 안에도 과일을 깎아 넣어두고 나갔고, 나는 엄마의 지갑에서 꺼낸 돈으로 방과 후에 친구들에게 허세를 떨며 햄버거를 사줬다. 간혹 문방구에서 파는 장식품들을 사서는 친구들에게 이유 없이 선물하기도 했다. 엄마는 미술학원이며 피아노 학원이며 보낼 수업료를 감당하기 위해 밤늦도록 일했지만, 나는 간간히 학원 수업을 빼먹고 밖에서, 친구 집에서, 놀이터에서 늦게까지 놀았다. 



그날도

어둑해질 무렵 집에 도착했을 때 집안은 아무도 없는 듯 컴컴했다. 엄마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으니 오늘도 성공적인 일탈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화장실에서 인기척이 들려 가보니 엄마가 변기 위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둠 속에서 엄마는 고개를 숙인 채 어떤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고, 깊은 한숨 소리를 들었다. 엄마는 멈칫한 나를 보고는 건조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의 까만 얼굴이 어둠 속에서 더 새카매 보였다. 안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누운 엄마가 걱정되기도 하고, 혹시나 학원 수업을 빠진 것을 들킨 것은 아닐까 철렁하는 마음에 주위를 서성였다. 그때 엄마는 나지막이 학원을 그만 다니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소리치지 않는 엄마를 보자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내 어린 시절의 훈육이란 잘못을 저지르면 회초리를 맞던 때였다. 엄마는 내가 말썽을 부릴 때마다 회초리를 들었다. 피멍이 들도록 맞는 날도 있었고, 운 좋은 날엔 가볍게 엉덩이 몇 대만 맞고 벽을 보고 손을 들고 있는 벌로 그친 날도 있었다. 그날은 엄마의 화난 얼굴도, 다그치는 엄마의 목소리도, 회초리를 들고 바닥을 탁탁 내려치는 모습도 없었다. 학원 선생님이 내가 결석할 때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결석을 알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낀 감정은 적어도 선생님에 대한 배신감은 아니었다.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하지 못할 시절이라고 말하며 엄마는 미소를 짓는다. 마음 편히 웃을 수 없던 그때를 말하며 이제는 엄마가 웃는다. “그랬어?”라며 무심하게 대꾸하지만 엄마가 급여명세표를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던 그날의 모습을, 사실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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