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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다 Oct 05. 2020

할머니의 등

내게 남은 단 하나뿐인 기억

나에겐 낯선, 하지만 낯설지 않은 할머니가 있다. 아빠의 엄마, 그러니까 친할머니. '할머니'라고 불러본 기억이 없는 나는 조부모와의 애틋함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여름방학이면 할머니 댁에 가서 머물다가 온다거나, 할머니와 전화 통화를 한다거나, 명절에 할머니께 용돈을 받아왔다던가, 뭐 그런 사소한 것들을 말이다. 나에겐 없는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인 걸까, 그게 왜 부러운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도 내 어린 날의 하루가 떠올랐다.


내가 기억하는 친할머니와의 추억은 단 한 장면뿐이다. 할머니가 나를 업어주셨던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업고 엉덩이를 토닥이며 창문 밖을 내다보고 계셨다. 할머니의 쪽 찐 머리와 어린 내게도 작았던 할머니의 등이 기억난다.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며 신기해했다. 그때 내가 세 살 쯤이었다고 했다. 서울에 올라오셔서 우리 집에 며칠 머물다가 가셨던 날이었다고.

  이듬해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친척들과 뛰어놀았는데, 그날 장난스럽게 찍은 사진이 나에게 남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할머니는 첫째 며느리를 보고 아빠를 낳았다. 대단한 막둥이로 태어난 아빠 덕분에 막내 손주들이라며 언니와 나를 그렇게 예뻐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옛날 분이지만 딸들이라고 못마땅해하지 않으시고 그저 예뻐해 주셨다고. 내가 예민하게 잠자리를 가리는 탓에 할머니 댁에 가서 자는 밤이면 날이 새도록 울어 젖혀서 온 가족이 잠을 설쳐야 했다던 그 밤에도, 아마 할머니는 이불속에서 껄껄 웃으셨을 것 같다. 전해 들은 그 이야기들의 끝에선 늘 할머니의 등이 떠오른다. 보드라웠나 싶은, 할머니 등의 촉감도 어렴풋이.


할머니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장례를 치르던 날에도 슬퍼하지 못했던 나는, 떠올릴 다른 장면이 없어서 자꾸 머릿속에서 할머니의 등만 매만진다. 낯설기도, 낯설지 않기도 한 할머니의 등을. 누군가의 뒤돌아선 등을 바라보는 것은 그리움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내가 바라보던 할머니의 뒷모습, 그 하나뿐인 기억을 그리워한다는 말이 왠지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움, 애틋함, 사랑, 비슷한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마음인걸. 적당한 말은 찾지 못했지만 귀한 것은 분명했다. 그저 단 하나뿐이니까 귀한 것이라고.


아주 어린 시절이라도 내가 몇 번이고 바라보고 부르고 안겼을 할머니를 깨끗이 잊은 것처럼, 내 시절을 스쳐가는 많은 이들도 나와 함께한 것들을 전부 잊을 수 있겠구나, 단 한 가지 기억으로만 남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조금 조심스러워진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그것이 잊히지 않는 뒷모습이라면, 그렇다면 뒤돌아선 등으로 기억되어도 괜찮겠다 싶다. 한 조각으로 남아있는, 언젠가 어린 내가 업혔던 할머니의 등은 볼을 비빌만큼 포근했을 테니까. 내가 조금 더 온기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건 내 할머니의 등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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