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 깬다고 세상이 깨어지나
전쟁
어제는 우리 집에 전쟁이 있었다.
일방적으로 혼냈다고 하기엔 나도 '죄책감'이라는 매서운 회초리에 너무 많이 혼나서 전쟁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분명 매일매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인데 계속 뭐가 꼬이고, 잘 되던 일도 안 되고, 마음도 무겁고, 몸도 무겁고 그런 날이 있다. 어제가 나에겐 딱 그런 날이었다. 그리고 그런 날은 꼭 내가 무언가 더 잘해보려고 다짐할 때 머피의 법칙으로 찾아왔다.
파도도 잠잠케 하는 마법의 글쓰기
최근 브런치를 시작했고, 블로그도 오래 쉬다가 한 달 전부터 다시 시작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때문에 파도타기 같은 육아의 삶에선 큰 도움을 준다.
서핑을 몇 번 했었다. 서핑 보드에 엎드려 좋은 때를 기다리다가 서핑 보드에 몸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순간 내가 하늘에 나는 것 같은 기쁨이 몸을 휘감는다. 거기에 파도를 타는 것에도 성공하면 바다와 한 몸이 된 것 같은 경이로움마저 든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초보 서퍼는 이내 파도에 먹히거나(?) 물에 빠지고 만다. 육아가 딱 그렇다. 무언가를 이룬 것 같지만 이내 또 파도가 치고, 그 파도를 운 좋게 올라타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파도에 가라앉는다. 그렇지만 기쁨의 맛을 보았기에 계속해서 서핑 보드에 몸을 싣는 삶, 난 지금 그 삶의 중앙에 있다.
그런 나의 삶에서 글을 쓰는 것은 훌륭한 서핑 강사에게 특강을 받는 것과 같은 의미랄까. 아이가 잠든 시간에 혼자 오늘 하루를 기억하고 기록하다 보면 내일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도 생기고, 내 육아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길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여전히 육아는 어렵지만 적어도 파도에 술렁거렸던 나의 오늘 하루가, 나의 마음이 잔잔해졌다.
그저께 브런치에도 글을 쓰고 블로그에도 글을 썼다. 특강을 두 번이나 받았으니 내 마음은 참 충만했다. 아이들에게 사랑만 줄 준비가 완료되어있었다.
어제의 일기
굿모닝 뽀뽀로 아이들을 깨웠는데 아이들이 그날따라 투정을 많이 부렸다. 수업 시간에 무엇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첫 아이가 주스를 꺼내와 마시려고 했다. 안된다고 했지만 아이는 주스 뚜껑을 열었고 주스가 좀 쏟아졌다. 티슈를 가져온 사이에 주스는 온 책상에 쏟아져 있었다. 엄마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인지 아이는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못했고, 테스트 시간엔 너무 답이 뻔한 문제를 틀렸다. 점심 메뉴는 미리 만들어 놓은 카레였는데 아이들은 카레가 싫다고 떼를 썼다. 팬케이크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평소엔 메뉴 투정 없이 주는 대로 잘 먹는 아이들이다.) 화가 난 상태로 팬케이크 반죽을 휘휘 섞는데 플라스틱 볼에 구멍이 났다. (나는 헐크인가) 팬케이크는 조금 탔고, 남편은 2층에서 내려오며 탄 냄새가 난다고 했다. 밥 먹고 오후 수업이 있어서 부리나케 준비해 앉았는데 오후 수업이 갑자기 캔슬되었다. 그리고 미술 선생님께 메일이 왔다. 분명 제출했던 과제인데 missing 되었다고 했다. 제출했다는 증거(?)들을 폭풍 스크린 캡처해서 답장을 보냈다. 이번엔 다른 과제물이 없단다. 이미 점수까지 매겨진 과제였다. 황당했지만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메일을 보내려는데 아이가 와서 내 팔에 매달렸다. 엄마 메일 쓰고 있으니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계속 장난을 쳤고, 둘째를 말리는 사이에 첫째가 이상한 문자들을 남발해 메일을 보냈다. 고백하자면 외국생활에서 메일은 나의 자존심이다. speaking은 잘 못하지만 writing은 할 수 있다는, 10년의 영어교육을 받은 나의 우스운 자존심 말이다. 외국인들은 말의 억양이나 발음, 단어의 사용 같은 것들로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교육을 받은 사람인지 판단하곤 하는데 말을 잘 못하는 것은 나에게 참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메일을 엄청 '공들여서' 쓰는데 이상한 메일을 보낸 건 내 자존심에 펀치를 날린 격이었다. 나는 화를 냈다. 그런데 엄마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르는 아이들은 내 등 뒤에서 이내 장난치고 깔깔거렸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너희는 공감을 못하냐며, 너희는 왜 엄마가 화를 내는데 아무렇지도 않냐며 소리를 질렀다.
쓰고 나니 좀 치졸한 엄마 스멜이 풍기네.
그래서 글쓰기가 좋다. 나를 돌아보는 최고의 도구이니까. 길고 길었던 하루도 이렇게 기록하고 나면 종이 한 장밖에 되지 않는 것을...
접시 깬다고 세상이 깨어지나
김국환 님의 노래 가사가 생각났다. 접시 깬다고 세상이 깨어지겠냐고. 우리도 접시를 깨자고. (물론 노래의 의미는 나의 그것과 다르다.)
꽤 쓸모 있었던 플라스틱 그릇은 깨졌지만, 나의 세상은 그대로다. 태풍처럼 비가 쏟아지는 새벽에도 아이들은 세상 고요하게 잠을 잤고, 개운하게 일어났다. 오늘은 수업하기 전에 오렌지주스를 먹어도 되냐고 묻는 아이. 아이도 어제를 잊진 않았나 보다. 그냥 잊어주면 좋겠는데...^^; 우리 아이들 마음에는 엄마의 웃는 모습만 남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맥모닝을 사러 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