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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데이팔팔 Sep 25. 2023

의원면직 안 합니다 정년퇴직 할 거예요

공직에서 벗어나지 않을 이들을 위하여


공무원을 그만둔, 또는 그만 둘 사람들의 이야기가 참 많은 것 같아서 정년퇴직까지 굳세게 다닐 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좋다거나 혹은 추천하는 직업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조직 안에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라는 얘기.


이곳은 나의 두 번째 직장이다. 첫 번째 직장은 물류회사였는데 흔히들 말하는 포워딩 업체였다.


제조업체에서 수출입 업무의 전반을 포워딩업체에 외주를 주면, 외주 받은 포워딩 업체에서 해당 제조업체에 상주하며 수출입에 제반되는 서류업무를 대행해 주는 식이었다. 업체마다 수행하는 방식은 다르나 일단 내가 일하던 회사는 그랬다. 애초에 각기 독립된 다른 회사였으나 원청과 하청의 느낌이 다분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실제로 제조업체 직원들이 나를 하청업체 직원 대하듯 하대했으며, 그것이 나의 자존심(?)을 건드려 결국 퇴사로 직결되었다. 퇴사를 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지만 계기는 그런 갑질이었다.


당시 나와 함께 직장생활을 했던 동료들과는 아직도 언니동생 하면서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퍽 직장생활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상황이 주는 불합리함을 제외하면 말이다.


3년 남짓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마지막에는 정말 만정이 떨어져 살짝은 홧김에 퇴사의사를 밝혔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 내 자리는 나보다 물류 쪽 경력이 긴 분이 대체했고, 최근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그분이 아직도 같은 자리에서 근무를 하고 계시다고 한다. 다른 직종에의 관심사나 주특기가 없었던 내가 그렇게 홧김에 퇴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자리는 아직 내 자리일지도.


퇴사를 하고서는 그동안 모았던 돈을 가지고 바로 유럽여행을 떠나 한 달 반을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와서 반년은 취업 준비를 하는 둥 마는 둥 어영부영 지냈는데 좀처럼 내 눈에 맞는 회사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첫 직장을 다니며 깨우친 것은 규모가 작은 회사일수록 체계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것을 감수하고서까지 다시 작은 회사를 가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중견기업이나 대기업을 가기에는 일단 나이가 걸렸고, 학벌도 그냥 그랬고, 이전 직장의 경력을 살리기에는 재직기간이 애매했고, 있는 거라곤 외국어(영어) 능력 하나였는데 사실 그것도 취준생들 사이에선 별로 내세울 바가 못됐다.


그래서 찾은 대안이 공무원이었다. 대학 시절 내내 나의 부모님이 돌림노래를 불렀던 그 직업. 대기업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 앞에서 얘기할 때 꿀리지는 않는 직업. 박봉인 것을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지만 그래도 내 자식이 됐다 하면 자랑스러워 할 수는 있는 직업.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상은 나도 갑자기 실직할 위험은 없는 직업. 그렇게 나는 공무원 시험 수험생이 되었다. 대단한 소명의식이 있었느냐? 당연히 아니다. 능력도 없이 대기업을 원하던 그 시절의 내가 찾을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된 공무원이 나의 적성에 맞느냐고?

적성, 이라는 것은 내게는 좀 어려운데...

일단 공무원 조직에 대해 느낀 바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겠다.


5년 차 공직자가 보는 이 공무원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잘'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조건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간만 가면 된다. 하지만 절대로 '잘못'되어서는 안 된다. '사고'가 생겨서는 안 되고, '민원'이 유발되어서도 안되고, '민원의 소지'가 있어서도 안된다. 혁신과 발전에 목을 매지만 그런 것은 여기서 결단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고? 실패를 무릅써가면서 까지 새로운 시도를 할만한 결재라인(책임자)이 이 조직에는 없다. 이 조직은 그런 실험적인 캐릭터를 키워내지 못한다.


다만 안정적일 뿐이다. 어제도 오늘 같고 내일도 분명 오늘 같을 것임이 틀림없는 조직이다. 열심히 한다고, 잘한다고 먼저 승진시켜 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조용히 사고 치지 않고 무색무취의 기체처럼 머무르고 있으면 연차가 쌓여 승진이 된다. 진짜다. 이 조직은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무것도 기대하면 안 된다. 낭중지추라고 하던가. 능력 있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자신을 드러내게 마련이지만, 공무원 조직에서는 능력이 있다고 승진이 잘 되는 것이 아니다. 지켜본 바 6급 승진까지는 연차가 쌓이면 절로 되는 것 같고(기관마다 다르다), 5급부터는 일도 어느 정도는 하되 가장 중요한 것은 윗선에 잘 비벼야 한다는 것이다. 우습게도 그렇다. 승진할 수 있는 연차가 되었을 때 '장'님의 눈에 들만한 사업을 맡았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다. '잘못'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사고 치지 않고' 일을 하면서, '장'님께 얼굴도장을 찍는다? 다음 승진 명단에서 본인의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색무취의 무난한 인간 그 자체다. 좋은 쪽으로도 안 좋은 쪽으로도 '튀지 않는' 사람.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특별히 하고자 하는 일(특히 생계에 도움이 될만한)도 없지만, 적당히 사회적인 척은 할 수 있고, 어느 정도 눈치도 있는 편이고, 학창 시절 매년 받았던 개근상으로 성실함은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어딜 가도 엄청 이목을 끄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나 내 몫은 해내는 종류의 사람.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늘 뒷말이 생기게 마련이지만 그런 것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 '마이웨이' 할 수 있는. 쓰고 보니 정말 직장생활에 최적화된 사람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직장생활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 나의 자리와 역할이 있고, 정해진 시간 동안 내가 할 일이 있는 곳.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을 동료라는 이름으로 만나 적당한 선의 친밀감을 공유할 수 있는 곳.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 안에서 성취감을 찾을 수 있는 곳. 이런 내게 공무원이라는 조직은 더없이 안정적이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인 조직이다.


대민업무를 하면서 맞닥뜨려야 하는 스트레스도 물론 있다. 조직 내부에서 빌런을 만날 때도 있다. 두 경우 모두 피할 수도 그렇다고 즐길 수도 없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견딜만하다. 스트레스 없이 직장생활을 할 수는 없다. 남의 돈을 버는 일은 다 그렇다. 그런 마음으로 견딜 뿐이다. 더럽고 치사하네, 오늘은 치킨이나 뜯자 하면서 말이다.


장담컨대 공무원이 적성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조직에 얼마나 잘 물들 수 있냐 없냐가 관건이다. 수동적이기만 한 이 조직에서 무력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나의 효용가치, 나의 생산성은 조직 이외에서도 찾을 수 있어야 건강한 공무원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애초에 직업과 적성을 연관시키는 그런 이상에 대한 기대는 저버린 지 오래이다.


내가 보는 나와 조직의 관계는 이러하다. 너무나도 시니컬하지만, 이 시니컬함이 내가 앞으로 이 일을 지속하는데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 하는 일에 감정을 싣게 되면 일에 휩쓸리고 만다. 아직 공직생활이 짧아서 가능한 말들일수도 있으나 현재까지는 그렇다. 아마 특별한 생계수단을 발굴해내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조직에서 정년까지 일하게 될 것이다. 국가발전에 대단히 크게 이바지하거나 엄청난 성과를 이루지는 않겠지만, 맡은 바 업무에 충실하면서 나라가 존속되는 데 공백이 없도록 톱니바퀴의 아주 작은 칼날이 되어 돌아갈 의향이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공무원 의원면직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예전보다 저연차 공무원들의 이탈이 잦아지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박봉이어서, 민원이 심해서, 조직이 너무 낡아서 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절망스러운 것은 적어도 상기 나열한 부분들은 앞으로 심화될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해결책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이 조직에 남아있을 사람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애매한 연차의 공무원이라서 할 수 있는 생각 일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 하루아침에 사직서를 쓰고 훌훌 털어버리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이곳에 남기로 한 나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정년퇴직이 목표인 모든 사람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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