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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밤이 Sep 04. 2024

성수기의 여름이 좋아진 이유

정동진에서 우리는 함께 여름을 보았다

 절기가 무색해진 지구 온난화의 시절이다. 여전히 한낮 태양의 기운이 밤까지 그득하다. 올해 여름은 특히 습한 것 같아 뭔가를 하려고 움직이면 땀이 나 고역이다. 집 문을 여는 순간부터 5분 이내 땀은 머리에서 눈 옆으로 흘러 내 목을 타고 내려가고 어느덧 축축한 땀들이 가슴팍에서 젖는다. 땀이 맺히기도 전에 흘러 버리는 이런 날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여름에 덥지 않은 것도 지구적 관점에선 이상한 것이라며 상황을 받아들이려 한다.


 습한 날씨에 허덕이면서도 여름휴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공공 부문에서 프로젝트 단위로 일을 하던 내 직업 특성상 여름은 늘 바쁜 시기였다. 또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아 여름 성수기인 7-8월에는 휴가를 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일을 그만둔 첫 해의 여름은 남들처럼 떠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정동진에서 8월 1일부터 독립 영화제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8월 초, 극성수기의 관광지에 가도 괜찮을까 걱정되었지만 마침 가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어 정동진행 기차표가 매진되기 전 미리 왕복 기차표를 함께 예매하였다.


 정동진은 국내에서 바다가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펼쳐진 동해 바다의 묵직한 청량감이 눈에 들어왔다. 습습한 바닷바람도 온몸을 훑었다. 기차역을 빠져나와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규모가 작은 해수욕장에는 휴가철임에도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금빛 모래와 에메랄드 바다를 느끼고 싶어 양말을 벗었다.


 뜨거운 모래는 잠시, 태양 빛이 아직 바닷속까지는 침투하지 않았는지 파도의 시원한 물줄기가 내 발목을 잡았다. 잠시 파도의 간지럼을 즐기고 시원한 카페로 이동했다. 이층집으로 된 원목 카페는 습한 날씨 덕분에 나무 냄새와 원두의 향이 함께 어우러져 고소한 느낌을 주었다.


“무지개다!”


 같이 온 친구가 카페에 앉아 있다가 소리쳤다. 비가 오다가 그치고 해가 뜨기를 반복하더니 하늘은 바다부터 하늘까지 선명한 무지개를 만들어 냈다. 무지개는 점차 옅어지더니 10분 정도 지나자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짧은 찰나의 무지개를 발견할 수 있는 행운이라니, 영화제를 앞두고 기분 좋은 징조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영화제는 저녁 일곱 시 개막식과 함께 시작되었다. 정동초등학교의 뒤편은 여름의 산들이 푸릇푸릇한 자태를 각자의 모양대로 뽐내고 있었고 운동장 한가운데에는 대형 스크린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종종 학교 옆을 지나가는 기차들의 소리가 그 풍경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무지개가 또 떴네!”

 이번엔 내가 소리쳤다. 학교와 산과 구름을 연결하듯이 무지개가 더욱 선명하게 떠 있는 것이었다. 개막을 알리는 인디 밴드의 자유로운 목소리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뻗어 올랐다. 하늘은 곧 무지개를 먹어 버리고 주홍 빛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해가 모든 것을 뱉어 버리고 모습을 감추며 어둑해지는 시점에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위트 있는 스토리, 저마다의 특별한 색을 내뿜는 독립영화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니 정동진은 깊은 밤으로 접어들었다. 파란 배경에 무지개를 그려주었던 하늘은 이제 영롱한 별들을 토해 내고 있었다. 서울에서 보기 힘든 별의 조명들이 영화를 함께 조명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더운 야외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오밀조밀 앉아 같은 방향으로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각자의 방식, 개별의 공간, 혼자만의 느낌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는데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 또한 삶을 즐기는 또 다른 방식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시간이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성수기의 휴가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삶 또한 불편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며 내년 여름의 성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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