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그림이 예쁜 책을 만났다. 마치 동화 속 한가운데로 내가 들어온 듯 그림책 전반에 깔려있는 다홍색이 참으로 매혹적이다. 이 책은 치매와 죽음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심각한 소재보다 마레가 보여주는 공감 능력에 난 더 주목하고 싶다.
이 조그만 꼬마 마레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마레는 벚나무 아래 놓인 등나무 의자에서 태어났어요
마레는 그 태생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등나무 아래서 책을 읽고 있던 엄마 뱃속에서 마레는 서둘러 나오고 싶어 발을 쑥쑥 내밀었다. 태어난 지 여섯 달만에 정원을 돌아다니고 첫 말이 엄마 아빠가 아닌 '과자'라고 했다니 일반 상식으로는 도통 알 수 없는 마레다. 그렇게 특별하기에 마레가 더욱 궁금하다.
태어난 지 여섯 달이 되어서는 정원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지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서 하늘하늘 기다란 꽃을 들고 먼 하늘을 바라보는 마레 그림이 참 좋다. 꽃밭에서 살랑살랑 대는 바람을 맞으며 걷는 저 장면에서는 풀밭을 걸을 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마저 실제로 들리는 듯하다. 지그시 뜬 저 눈과 앙 다문 입술은 마치 세상의 비밀은 다 안다는 듯한 초월자 모습 같기도 하다.
그 곁에 마레는 혼자가 아니다. 꽃밭에서도 나무 그네에서도 늘 마레 옆에 할머니가 계시다. 마레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할머니였다. 보호자로서의 할머니가 아닌 정말 딱 나랑 재미나게 일상을 함께 하는 친구로 말이다.
할머니는 마레의 가장 친한 친구였어요
아이와 함께 놀아주는 게 아닌 진짜로 같이 노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임을 안다. 외동아이의 엄마가 아이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가끔 힘들어하는 모습을 봤었다. 그럴 때면 외동이 아니고 아이 둘이서 이러니 저러니 싸우더래도 둘이니까 그나마 내가 편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친구 같은 부모, 그것이 정말 가능하기나 할까. 유년시절을 아이답게 보내지 못한 나로서는 그게 좀 쉽지 않았다. 권위적인 부모 아래 자란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또한 아이의 현재와 미래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부모라는 자리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재단하고 간섭하게 된다. 부모라는 책임과 아이의 안정된 행복이라는 미명 하에 부모는 그런 사람이 되고야 만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런 책임감에서 조금은 벗어난 제2의 부모가 필요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런 존재로 많은 역할을 하실 수 있다. 아이 성장에 미치는 고된 책임은 부모가 지고 잔소리 없는 무한한 애정과 사랑을 조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마레에게 할머니가 그런 존재이다. 좋아하는 것이 비슷한 이 둘은 그렇기에 더 잘 통할 수 있었다. 자기를 알아주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이상 든든한 배경이 또 무엇이 있을까.
어느 날 할머니가 쓰러졌어요
그랬던 할머니가 쓰러지셨다. 화사했던 화면은 마레의 마음처럼 어둠이 깔린다.
할머니, 얼른 일어나! 얼른!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다. 예전과 다르게 모든 것이 어려워져 버린 할머니를 보고 마레는 낙심하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할머니를 대하고 기다린다.
주변 사람은 할머니를 치매 환자로서 대하지만 마레는 그렇지 않았다. 텅 빈 병실 벽에 그림을 그리고 과자 담는 접시도 빼놓지 않는다. 마레는 정확히 알고 있던 것이다. 할머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레 나름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그림책 화면은 다시 환하게 되고 누워있는 할머니의 표정에도 미소가 지어진다. 모두가 알아듣지 못하는 할머니 말에 마레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다. 가족 모두 정신이 없는 틈에 마레는 할머니의 슬픔을 직감한다. 할머니 눈물이 눈물바다가 되어 침대가 출렁거리는 그림은 할머니의 깊은 슬픔을 오롯이 표현해냈다. 그 옆에서 할머니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마레, 마레가 있어서 그나마 할머니에게 얼마나 다행인지.
이대로 두면 방 안이 눈물로 가득 차고 말 거야!
치매라서 모르겠거니 제쳐두었거나 아니면 어느 누구도 엄두도 못 내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마지막 이별에 팔을 걷어붙인 건 마레였다.
저리 비켜! 너희들이 도와주지 않겠다면, 우리끼리 갈 거야!
할아버지는 두 눈을 감은 채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었지요. "안녕."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어요. 그러고는 마레를 바라보며 생긋 웃으며 말했어요. "과자."
온전히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마레가 아니었다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아름다운 마지막 그림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따짐도 없이 직관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이 마레에게는 있었다. 그랬기에 비록 치매에 걸렸더라도 친구 같은 할머니의 소망을 들어줄 수 있었다.
마레의 어린 시절을 할머니가 보살폈다면 할머니의 노년은 마레가 똑같이 할머니에게 돌려주고 있다. 교감하며 진정한 소통을 하는 이 둘은 정말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단짝이다.
겪지 않은 일이라 모르겠다. 그 고통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이제는 너무나 흔해져 버린 치매라는 이 울적한 병이 내게 닥치는 현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여기 마레와 같은 마음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