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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 새로운 시작

by 윌버와 샬롯

아이들에게도 이 그림책을 꼭 보여주고 싶어 잘 보이는 거실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림이 무척 매혹적인 책이다. 마치 사진의 한 컷처럼 생생하다. 카메라 렌즈를 주시하듯 소년이 나를 쳐다본다. 당신 같으면 이럴 때 어쩔 거냐며 묻는 것 같다.


마침내 전쟁이 끝났어. 하지만 우리가 돌아갈 집은 없었어.


전쟁이 끝나고 여기 살아남은 가족이 있다. 비록 갈 집은 없지만 그들에겐 자동차가 있었다. 캄캄한 밤에 가족이 서로 포개 누워 눈을 붙일 작은 자동차 한 대. 입을 옷은 없지만 그 때문에 빨랫감이 줄었다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어떤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지만 엄마와 아빠는 그 와중에도 긍정적인 말 아이들을 위로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막막한 현실에 그들에게 또 다른 대안이 있을까.


책에서는 어떤 전쟁이라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세계대전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영화 '기생충'과 함께 올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목받던 영화 '1917'이 연상되기도 했다. 작전을 중지하라는 말을 전해야 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포화 속 달리던 병사가 떠올랐다. 그 속에 숨죽이며 생존을 숨기던 갓난아이와 어린 여인도 있었다. 영화 속에 있던 사람들의 비극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영화의 배경인 제1차 세계대전은 그다음 해인 1918년 11월 11일에 끝난다.


다행히도 그림책의 시간은 전쟁이 끝난 이후다. 더 이상 하늘 위 포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안네 프랑크 같은 비극의 순간을 맞지 않아도 된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승리이다.


그러나 그다음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현실을 살아내기가 당장은 이 가족에게 너무 암담해 보인다.


아무리 긍정적이고 밝게 부모가 말한다 하더라도 처참한 현실을 아이들이라고 모를까. 그럼에도 부모의 단단한 태도와 말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아이에게 힘든 현실을 지탱하게 할 힘을 주기 때문이다. 어른마저 절망적인 어조로 말한다면 아이들은 어찌하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의 아빠도 이 그림책과 같은 부모다. 아이 앞에서는 익살스럽게 걷고 있지만 실상은 죽음 앞으로 들어가는 눈물 나는 명장면이 생각난다. 큰 탱크가 선물이라며 숨바꼭질하자던 아빠의 하얀 거짓말은 그렇게 아이를 살려낸다.


그때부터 우리는 길에서, 자동차에서 살게 되었어


작은 힘이 모여 다시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아이들 작은 조약돌로 놀이를 시작하고 비둘기의 간지럼에 웃기 시작한다. 만들어서 먹일 빵은 없지만 요리 이야기를 해주는 요리사는 잠시의 배고픔을 잊게도 해준다. 전쟁통에도 아이는 태어났고 학교는 세워졌었다. 사람은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스스로 희망을 찾아간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승리임을 보여주는 그림책이다. 살아 있어야 그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사람은 그래서 위대하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우리는 갖고 있다.


처참한 폐허 속에서도 빛나 보이는 건 바로 사람이다. 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이다. 그들이 새로운 시작의 발판이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 그래서 반갑고 밝은 내일을 예견하게 한다.


뭐 어때! 그만큼 빨랫감이 줄잖니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즘의 장마철 수해 같은 자연재해 고생을 해 본 적 없다. 비가 많이 와 학교 가는 길에 마을버스가 수중 운행을 하며 겨우 지하철역에 도착했는데 전철이 운행을 중단해 투덜투덜 다시 집에 돌아온 적이 있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비에 쫄딱 젖어 축축하게 집에 다시 돌아와 허탈했던 장마철 어느 날의 기억, 장마에 대한 지금껏 내 불편했던 경험은 그것뿐이다. 뉴스에서 집에 물이 잔뜩 들어와 세간살이를 다 젖어버린 집들을 보자면 난 여태 운이 좋은 편이다.


지금도 여전히 살 집은 있지만 그 공간에 지불하는 막대한 비용에 요즘은 좀 허덕인다. 집이란 어떤 것인지, 이 공간을 위해 언제까지 이런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교육, 편의, 안전, 가치 그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우리는 많은 대가를 치른다. TV 뉴스며 신문기사며 부동산 정책 소식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시장원리나 대의는 제쳐두고 내 당장의 손해와 불편에 솔직히 화가 나기도 한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전쟁 후의 그램책 속 가족만큼이나 할까마는 우리도 전쟁 같은 코로나 일상을 지내고 있으며 지속적인 주거의 불안정을 안고 있기도 하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 매해 억 단위로 치솟는 주택 시장을 쫓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똘똘한 집 한 채 갖기가, 안정된 집에서 오래도록 살기가 어찌 이리 힘든지.


전쟁 후 희망을 얘기하는 책 이야기는 집 없이 캠핑카나 요트에서 버텨보는 다른 나라 사람들 모습이 엉뚱하게도 오버랩됐다. 그림책은 때때로 작가가 말하는 본질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독자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읽는 자의 상황에 따라 그림책은 그렇게 자의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어쩌면 전쟁이 아니어도 충분히 우리도 그렇게 전쟁 같은 참혹한 현실을 미래에 맞이하게 되는 건 아닐까.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모욕이 있는 곳에 용서를
다툼이 있는 곳에 화합을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으려 하기보다는 위로할 수 있도록
이해받으려 하기보다는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랑받으려 하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림책은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 말로 끝맺는다. 이 기도 말처럼 내 마음에도 어서 평화가 깃들긴 바란다. 살아있어 파티 같다고 아이들이 말한다. 춤추며 피리 부는 천진한 이 아이들처럼 나도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이제는 좀 자유로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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