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제목만 알고 도서관에 갔다. 책이 있는 위치를 검색해 서가에서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짤따란 크기에 살짝 당황했다.
책 표지만 보더라도 빨간 끈을 매개로 이야기가 펼쳐지겠구나 짐작은 했다.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작가도 비슷한 시도를 한 그림책을 본 기억이 있다. 솔직히 그 기억 때문인지 이 그림책의 첫 느낌은 마냥 신기하고 설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대가 그리 크지 않았던 때문인지 책을 다 보고 덮을 때는 가슴 한편이 짠해졌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산다는 것은 그저 다 비슷한 모습인가 보다. 몇 글자 없는 이 짧고 간단한 그림책에서 내 앞날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약속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편이다. 되도록이면 적어도 5분 전에는 미리 도착해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기차를 타더라도 예약 시간보다 한참 전에 역에 도착해 있어야 안심된다. 서두르고 촉박하게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
대학 때 만나기로 약속한 친구를 오래도록 기다린 적이 있다. 아직 핸드폰이 있기 전이라 연락할 길이 없었다. 무작정 그 자리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늦는 친구에게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나중에는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친구가 늦게라도 나왔는지 나오지 않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직 기억하는 것은 내가 그렇게 오래 기다린 것에 관해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한 것에 대한 적잖은 충격이었다. 안 오면 그만이지 미련하게 기다린 걸까. 친구에게는 그만큼 내가 하찮은 존재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는지 난 서서히 그 친구와 멀어졌다.
기다린다는 건 그렇다. 내게 기다림이란 온 마음을 다해 다가가는 행위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어서 중학교에 가기를 소망했다. 언제부터인가 국민학교 6년이 너무나 지루하고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지우개 따먹기 하는 남자애들, 연예인 얘기하는 여자애들, 이해는 못하지만 어려운 고전 책을 훈장처럼 끼고 살던 나와는 맞지 않다 생각했다. 이후 고등학교 때까지는 어서 대학생이 되기를 누구나 그렇듯 간절히 기다리고 바랬다.
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독립을 갈망했다. 내 의지대로 삶을 꾸려가고 싶었다.
그래서 공부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버틸 수 있었다. 내 진정한 존재 가치를 찾기 위해 부모 휘하 집이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지난한 인내 끝에 대학을 입학해서야 난 비로소 나의 본모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본가를 나와서야 자유를 찾았다 느꼈다. 인생의 제2 전환점을 맞이했다.
나는 기다립니다. 어서 크기를
잠들기 전 나에게 와서 뽀뽀해 주기를
그러나 그 자유는 막대한 책임을 짊어진 짐이었다. 삶을 홀로 일군다는 것은 기대와 달리 기세 등등한 탄탄대로만이 아니었다. 매 순간 도전이고 선택의 갈등이다.
졸업도 하기 전 취업을 하는 동기들에 의기소침했고, 졸업을 하고도 한동안 백수를 지내는 동안 느꼈던 불안과 고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어두운 동굴로 들어가 숨어있던 나날이었다.
누구에게는 사랑도 참 쉽던데, 난 그것도 어려웠다.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지, 내게도 천생연분이라는 인연이 존재할지, 용기가 없어 짝사랑으로만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드디어 인연을 만나 이 사람이다 확신이 들기도 했지만 '혹시나 내 판단이 틀리면 어쩌지'하며 결혼을 앞두고도 상대를 지치게 하기도 했다.
그렇게 결혼만 하면 아이는 자연스레 생기는 줄 알았는데 내게 그 기다림은 참으로도 길고도 가혹했다.
세상은 내게 쉽게 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죽을만치 힘들게 견뎌내야 비로소 손을 내밀었다.
케이크가 다 구워지기를
비가 그치기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는 편이다. 살면서 그런 경험이 있기도 했다. 힘들었지만 대학도 갔고 독립도 했고 취업도 했으며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살고 싶은 동네에 집도 샀다. 오래도록 소망하던 일이 시간은 걸렸지만 이루어졌다. 마음속에 품으면 인생의 항로가 신기하게도 그쪽으로 바람을 불어주는 것만 같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오랜 꿈을 꾼다.
크리스마스가 오기를...
그림책에서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부부만이 남는 그 이후 모습이 참 쓸쓸하다. 아프고 병들고 말라가는 여인 모습에 감정이 이입된다.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듯이 이 책도 그렇다. 떠난 자도 그렇겠지만 남는 자도 그렇다. 꼬마일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주인공 남자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삶은 그렇게 기다리며 이어지나 보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모든 연결고리로 우리는 이어져있고 서로 엉키며 기다린다. 순조로울 때도 있지만 매듭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꽁꽁 묶여 있을 때도 있을 것이다. 아이가 처음 빨간 끈을 낑낑 끌고 있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삶의 끈이었다.
이 책이 그리고 있는 삶의 반 정도를 난 지나왔을까. 난 어디쯤 와있을까. 내 삶이라는 끈의 마지막도 그렇게 사랑으로 매듭이 지어지면 좋겠다. 그럼 참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잠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