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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신비하고 평화로운 숲을 찾아서

: 작은 당나귀

by 윌버와 샬롯

"오늘은 oo 형아랑 놀지 않을 거니?"

"응. 못 놀아. oo 형아 오늘 바닷가 놀러 간대."


주말마다 마스크를 쓰더라도 잠시 함께 자전거를 타거나 게임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수다를 떨기도 하는 동네 절친 형과의 놀이가 오늘은 힘들다고 아들이 얘기한다.


한동안 제대로 된 나들이를 못하고 있던 차에 아들에게 건너 들은 가깝게 지내는 동네 지인의 여행 소식이 무척 부러웠다.


궁금하던 차에 카톡으로 바다로 놀러 가셨냐고 지인인 언니에게 안부를 물었다. 여행 중이어서 그랬는지 한참 후에나 답을 받았다. 오랜만에 나왔다고. 오전에는 물놀이를 했고 이제는 점심을 먹으러 가는 중이라고. 내가 좋겠다고 말하니 너무 좋다고 답이 왔다. 그동안 조심하느라 외식도 잘하지 못했던 집인 것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녀가 현재 얼마나 달콤한 외출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올초부터 평일에는 아이들 삼시 세 끼를 꼬박 차리고 더불어 학습까지 예전보다 더 챙겨야 해서 힘이 든다. 개학은 했다지만 일주일에 하루만 가는 정도이고 그 하루도 평가를 몰아서 하는 날이기 때문에 엄마 입장에선 더욱 신경이 쓰 수밖에 없다.


롤러코스터처럼 들쭉날쭉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확진자 숫자에 기분도 오락가락한다. 올해 계획했던 일들을 모두 접어야만 했다. 나 자신이 아닌 돌봄 하는 엄마의 역할만이 유의미한 요즘, 무 울적하다. 이건 코로나 블루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나만 그런 걸까. 모두가 비슷한 상황이니 힘들다고 마냥 투정을 부리기에도 머쓱하다. 코앞까지 온 것 같은 전염에 대한 공포는 여전하지만 다행히도 식구들이 건강하고 당장의 생계는 큰 지장이 없으니 정신적 힘듦은 좀 더 견뎌야 할 것이다.


오늘 그림책은 좀 어려웠다. 명확하지 않은 그림과 짧은 글 때문에 더 그랬을 수 있다. 한참을 들여다보니 조금씩 의미가 들어왔다.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얘기, 마음이 고단한 지금의 내게 그림책이 닥토닥 말을 건넸다.



작은 당나귀는 언제나 떠나는 꿈을 꿉니다

당나귀는 싱크대에 불이 나는지도 모르며 신문에 집중하고 있다. 무슨 기사길래 그렇게 바짝 신문을 들여다보는 걸까?


부산한 집만큼이나 바깥세상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집도 밖도 편하지 않은 요즘 우리 모습이 보이는 듯도 하다.


서로 밀쳐 대는 사람들 속에서 꿈꾸는 평화로운 곳

그럼에도 우리는 새벽같이 일어나 아직 눈도 덜 진 상태로 길을 나서야 한다.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서 잠시 눈이라도 붙이려면 자리라도 차지해야 한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했지만 이른 아침의 피곤 앞엔 출근길 자리 인심이란 사치일 뿐이다.


오늘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일분일초는 참 더디게 가는 것 같지만 하루는 어느새 후딱이다. 쳇바퀴 돌듯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 보면 하루도 한 달도 계절도 일 년도 금세 지나간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열심히 산 것은 같은데, 이뤄놓은 건 없어 보여 나이만 늘은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마스크를 쓰지 않아 버스를 못 타 기사를 폭행하는 사람, 학교를 가지 못해 예전보다 더욱 밥을 못 먹거나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 자기 분노를 가장 약한 존재에게 퍼붓는 부모들. 그런 가정에서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고 있는 어린아이들.


여러 시끄럽고 안타까운 뉴스는 귀를 닫고 싶게 한다. 여기 당나귀도 세상 소식에, 종종거리는 사람들에, 그런 일상에 지쳐간 걸까?


작은 당나귀는 신비한 숲을 찾아 떠났습니다

언제나 떠나는 꿈을 꾸던 당나귀에게 어느 날 구세주가 나타난다.


도시 끝에 울창한 숲이 있다네.
소리 없는 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신비한 숲.
그곳에 평화로운 성이 있다네!


신비하고 평화로운 숲이라니.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데, 난 자격이 될까? 소리 없는 이들만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작은 당나귀는 그 자격이 됐는지 신비한 숲으로 가 평화를 찾는다. 어떤 보물이라도 있을 것 같아 숲을 들쑤셔 놓은 사람도 있었지만 숲은 소리 없는 이들에게만 그 문을 열어줬다.


작은 당나귀도 흔들리지 않았다. 예전과 똑같은 일상과 세속으로 돌아온 당나귀지만 이미 경험한 평화로 안정을 찾는다. 누가 흔들더라도 절대 깨지지 않는 일상의 안식을 찾은 듯 보인다. 혼돈에서도 나름의 방식을 찾을 수 있도록 숲은 일러줬나 보다. 예전과 다름없이 작은 당나귀는 재봉틀을 돌린다.


재봉틀에서 멀리 떨어져 앉아있던, 신비로운 숲을 몰랐을 때의 무표정한 작은 당나귀가 떠오른다. 그러나 같은 공간임에도 따닥따닥 당나귀의 재봉틀 소리가 이제는 참으로 경쾌하게 들리는 듯하다.


어쩌면 작은 당나귀는 다시 일상에 지칠 때가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좀 힘들어하다 조금 쉬다 보면 다시 힘을 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신비한 숲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작은 당나귀 되었으니까.



재봉틀질을 하는 당나귀를 보니 얼마 전 해진 이불을, 결혼할 때 해온 이불이라 버리기 아쉬워 손 바느질 한 날이 떠올랐다. 꿰맬 요를 쫙 펼쳐놓고 대바늘로 꿰매던 날,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 시간이 꽤나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수백 번 저어야만 만들어진다는 달고나 커피가 랜선에서 한참 동안 유행했다. 옷걸이로 전락했던 실내 사이클은 요즘은 가족들 운동으로 문전성시다. 늘 아들의 학교 온라인 수업 과제는 우유를 얼려 잘게 부신 오레오 과자와 섞는 빙수 만들기였다. 재료를 사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뜨거운 햇빛을 맞으며 마트로 투덜거리며 가던 아들은 비록 예쁜 빙수 인증샷은 못 건졌지만 그래도 만족스럽게 빙수를 음미하며 과제를 마무리했다.


더위까지 겹쳐 모두가 지치는 나날의 연속이지만 자기만의 신비로운 숲을 찾아야 할 지혜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나름의 유쾌한 집콕 놀이가 이 시기를 조금은 버티기에 도움을 준다. 그림책 앞표지에 보이는 화분에 물 주는 편안한 얼굴의 작은 당나귀처럼.


작년 가을에 갔던 석양이 예뻤던 바다 사진으로 카톡 프로필 사진을 바꿔봤다. 아련한 추억에 잠기고, 그때의 어스름한 공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


언니, 바다 가서 좋았어요? 다음엔 꼬옥 우리 같이 가요...


이 그림책은 기형도의 시를 모티브로 했다. 시는 동화나 판타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숲으로 된 성벽 / 기형도

저녁노을이 지면
신(神)들의 상점(商店)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성(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사원(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성(城)

어느 골동품 상인(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城)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 있지만 우리 모두 자기만의 신비롭고 평화로운 성으로 떠나보 건 어떨까. 숲으로 된 성벽 안에서 당신이 농부이기를, 작은 당나귀이기를 부디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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