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합치면 정이 되는 합-정인데

: 나는 지하철입니다

by 윌버와 샬롯

지하철역 가까이 있는 집, 소히 역세권에 산다는 것은 재산가치에서뿐만 아니라 이동의 편의성으로 어디를 많이 다니지 않는다 해도 심리적 편 준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집에서 나와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가기만 하면 되니까.


20년 전 복잡한 일본 도쿄 지하철을 처음 접했을 때 참으로 난감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서울 지하철도 만만치 않다. 얼기설기 복잡하게 얽혀있는 서울 지하철 노선도는 여행 온 외국인 눈에는 당혹스러움의 시작이겠지만 현지인에게는 손수 운전을 하지 않아도 서울 어디든, 아니 그 주변 외곽으로도 내키면 갈 수 있다는 보장은 된다. 혹시나 길을 잃게 돼도 설령 그곳이 모르는 지하철역이라 해도 보이기만 하면 안심이다. 결국 지하철은 나를 집으로 데려다줄 것을 알기 때문에.


끝없이 이어지는 이 길 마디마디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통편으로 지하철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교통체증 없이 예상 시간에 딱 맞춰 갈 수 있어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버스도 그렇겠지만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은 한때 푸시맨이라는 사람이 버젓이 존재할 정도로 지옥철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붙기도 했다. 같은 이유, 즉 출퇴근이라는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사람은 지하철에 오른다.


탈 때부터 눈치가 빨라야 하는 공간, 바로 지하철이 아닐까. 고도의 심리전이 시작된다. 1차 시기는 어디에 줄을 서고 있어야 앉아 갈 수 있는지, 혹여 바로 앉지 못했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마라. 다행히 2차 시기가 있으니. 누구 앞에 서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빨리 앉을 수 있을지, 앉아 있는 사람 면면을 단박에 파악해야 한다. 마음을 푹 놓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패스다.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내릴 곳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짐을 서서히 챙기며 분주히 내릴 준비를 하거나 시선을 이리저리 바쁜 사람이 제격이다.


그러나 결국 운빨일 뿐이다. 확률이고 뭐고 그냥 그날 운이 좋으면 앉을 수 있는 거고 아니면 도착지까지 주욱 서있는다. 내가 서있는 앞자리만 빼고 양 옆자리에 자리가 나 그 타이밍을 다른 양 옆사람에게 놓치는 때에는 순간의 자리 선택에 대해 마음속 한탄이 용솟음치기 마련이다.


자리 눈치 보는 것에 지쳤다 싶으면 아예 자주 열리지 않는 방향의 출구 쪽에 자리 잡는다. 유리창을 바라보며 바깥 풍경을 멍하니 쳐다보거나 어둠 속 지하라면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살피는데 시간을 소요하기도 한다. 그나마도 심심하다면 유리에 비친 지하철 속 타인을 관찰하며 상상을 하기도 한다.


이 아가씨는 지하철에서 어쩜 저렇게 화장을 곱게 할 수 있을까? 화장대에서 아무리 여유로워도 저 정도 스킬이 난 없는데.


저분은 젖은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나왔나 보네. 늦잠 잤을까?


학생은 스타킹이라도 신지. 예쁜 것도 좋지만 너무 춥겠다.


당신 이어폰에서 소리 다 새어 나오는 거 알아요? 옆에서 시끄럽다고요.


저기 완주 씨가 달려옵니다. 어서요, 어서!


어느 역 몇 번 출구에서 만나


가끔 라인이 겹치는 지하철에서는 혼선이 빚는 경우도 있지만 약속 장소를 잡을 때 지하철역을 매개로 장소를 정하면 어지간하면 틀림이 없다. 그 장소가 만약 지하상가가 발달한 곳이라면 금상첨화다. 약속한 친구가 바로 오지 않아도 역 앞에서 무심히 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되니까. "아이쇼핑이라도 하고 있을 테니까 도착하면 연락해." 시작은 아이쇼핑이었지만 결국 손에는 뭐든 들려 있게 마련이다. 동네에서는 평소 보지 못한 저렴한 옷 등의 패션 용품에 금세 눈이 돌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뜻하지 않은 충동구매였지만 부담되지 않은 가격에 집에 돌아가 후회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마음의 여유가 들기도 한다. 그렇게 아이쇼핑이라도 하고 있으면 시간은 훌쩍 지나 지루할 틈 없이 친구는 내 옆에 와 있다. 그리고 지름신에 눈먼 친구를 얼른 제정신으로 끄집어내는 마술을 부리기도 한다.


문이 열리자 할머니가 꼬불꼬불 올라타요. 아, 처음 맡아 보는 짭짤하고 시원한 이 냄새!


반갑게도 이 그림책의 지하철은 2호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것도 요즘 가장 핫하다는 합정역부터 보여준다. 2호선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나로서는 그림 하나하나가 낯설지가 않았다.


지하철 안에서 한강 다리를 건널 때의 기분을 당신은 아는가. 어둠 속을 달리다가 갑자기 뻥 뚫리는 환함. 지상으로 나온 것도 무척 반가운데 거기다가 출렁이는 강이 보이기까지 한다. 마음속 우울함도 그때만큼은 강물에 비친 반짝이는 햇살만큼이나 환해진다.


어쩌다 일몰 시간에 그곳을 지나치게 되는 행운이 있다면 기분은 최고조다. 퇴근길에 맞이하는 절경은 한결 하루의 피로마저 가시게 해 준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강이 흐른다는 것에 외국인은 무척 놀라워한다. 현지인에게는 별거 아닌 것이 그들에게는 굉장한 축복으로 여겨지나 보다. 그런데 가끔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때는 그렇게 생각하는 외국인 말이 이해된다. '정말 아름다워. 서울에 한강이 있어서 참 다행이야.'


지하철을 기다리고,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세심히 그린 작가 그림에서 사람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분명 그만의 이야기와 사연이 있을 것이다. 작가는 그들을 쫒아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같은 지하철에 탔더라도, 그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더래도 우리는 사람의 외양, 표정, 옷차림, 구두 이런 몇 가지 단서로 약간씩은 추측하기도 한다.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고 있어도 그도 나처럼 목적의 그곳으로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향하는 그곳이 따뜻한 곳일지, 무거운 곳일지는 서로가 조금은 다르겠지만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견디며 향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매한가지일 것이다.


늦게까지 친구들과 함께 있다 부랴부랴 막차를 아슬하게 슬라이딩하듯 탔던 짜릿함. 서로의 집에서 중간 정도 되는 곳에서 손을 흔들며 아쉽게 헤어졌던 연애 시절. 지하철은 고단함이라는 애환도 가지고 있지만 젊은 날 청춘의 애틋함도 들어 있다.


지하철은 덜컹덜컹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오늘도 열심히 오고 간 친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수고했어, 오늘도.



keyword
이전 14화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건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