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집에 혹은 부모에 불만이 있을 때 나도 그런 생각을 가끔 했던 것 같다. 괜히 태어나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난 뭐하러 태어났을까.
여기 그림책 속 아이는 이미 그런 사정을 벌써 알아채 애초에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 걸까.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이 아이의 입장은 행운인 걸까. 어떤 것에도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의 이 태어나고 싶지 않은 아이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있습니다. 어느 날,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지구에 왔습니다.
별에 부딪혀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태양 가까이 가도 뜨겁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우주를 다니다 재미가 없어졌는지 마치 어린 왕자처럼 지구에까지 오게 된다. 지구에서 아이는 사자도 모기도 만나지만 그것이 무섭지도 가렵지도 않았다.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이에겐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계속 세상을 우주에서처럼 여전히 심드렁하게 구경만 할 뿐이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공원에 오도카니 앉아서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강아지는 영물인 건지 신기하게도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온다. 아이의 냄새도 맡아보고 핥기도 한다. 강아지는 계속 아이를 따라다닌다.
아이는 북적이는 마을로 온다. 공원 분수대 앞에 앉아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소방차가 지나가고 경찰은 도둑을 쫓는다. 빵가게에서는 구수한 빵 냄새가 풍겼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그런 것들이 여전히 어떤 의미를 주지는 못했다.
아무 상관이 없다면서 아이는 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걸까?
여자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아이한테 인사를 했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강아지에 이어 지나가던 한 여자아이마저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인사를 한다. 강아지도 그랬고 여자아이도 그런 것처럼 세상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자꾸 관심을 준다. '넌 왜 거기서 혼자 오도카니 있는 거니? 그러지 말고 나랑 놀자'라고 툭툭 말을 건네는 것 같다.
그러다 사건이 터진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쫓아다니던 강아지가 여자아이를 문다. 여자아이는 울먹이며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당연히 여자아이를 달랬고 강아지를 혼내준다. 엄마는 소녀에게 약을 발라주고 반창고도 붙여준다.
상처 입고 슬픈 이를 안아주고 관심을 주며 애정을 쏟는 것, 그런 과정을 역시나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하던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이번엔 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아이는 태어나고 싶어졌고, 그래서 마침내 태어났다!
태어난 아이는 이 복잡한 세상을 이제는 오롯이 느끼게 된다. 빵 냄새도, 모기의 가려움도, 그리고 부드럽고 좋은 엄마의 냄새까지 모두 아이 것이 된다. 엄마는 꼭 안아줬고 아이가 아프면 커다란 반창고도 든든히 붙여줬다.
이제 잘래. 태어나는 건 피곤한 일이야.
세상을 받아들인 아이는 사는 것은 무척 피곤한 일이라며 엄지손가락을 빨며 곤히 잠이 든다. 엄마의 따스한 입맞춤과 포근한 침대에서 이제 아이는 꿈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모든 것을 알고 태어났으니 아이는 앞으로 겪게 될 세상에 불만이 없게 될까?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아니까 온전히 삶을 만끽하면서 살게 될까? 아니면 역시나 태어나지 말걸 후회를 하게 될까?
나라면 어떨까? 그건 다음 질문과 같은 걸까? 결혼할래 안 할래? 혹은 아이를 낳을래 말래?
내 그 모든 선택은 후회하더라도 해보자였다. 가지 않아 미련을 남기기보다 부딪히는 것이었다. 후회는 나중에 해도 상관없다고. 느끼지 않는 것보다는 경험하는 게 더 낫다고.
그럼 지금은 그 선택에 후회는 없냐고 묻는다면 태어난 아이처럼 난 말하겠다.
피곤해.
세상은 그렇다. 힘들지만 그 모든 것을 느끼기에 삶은 이어진다. 다른 도리가 없다. 철학자처럼 거창한 인생관이 내게 있는 건 아니지만 난 이 모든 피곤한 일들을 겪어내며 이겨내려 한다.
산다는 건 무엇일까. 난 선택해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여기 아이는 뻔히 알면서도 이 삶이라는 것을 택하지 않았던가.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했던가. 분명 우리에게 삶이라는 것이 주어진 이유는 분명 있을 거라고 난 믿는다. 비록 지치고 힘들지만 날 태어나게 한 누군지 모를 조물주는 이유 없이 선택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사노 요코의 이 그림책은 분명 그녀의 다른 그림책도 떠오르게 한다. 백만 번을 살아도 어느 것에도 정을 주지 않던 <백만 번 산 고양이>가 그렇다. 두 그림책은 삶이라는 거대한 주제에 대해 비슷한 정서를 담고 있다.
사노 요코가 내게 전하는 주제는 솔직히 너무 어려운 이야기들이지만 난 여기 태어난 아이의 마지막 표정에 주목하고 싶다. 태어난 후 다시 공원에서 만난 여자아이에게 아이는 짐짓 자랑스럽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기 반창고가 더 크다고 말한다. 태어나기 전까지는 무표정으로 일관됐던 아이는 세상으로 뛰어들어서야 비로소 그 표정을 찾았다. 살아있기에 아이는 아이답게 빛이 났다.
그래 세상아, 내게 인사하며 툭툭 다가오렴.
나도 그렇게 살겠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채색이 아닌 일곱 가지 무지개 색깔 모두를 맛보며 살고 싶다. 각각의 색깔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것이 우리가 태어나고 살아야 하는 이유이며 태도이다.
그건 비록 너무 피곤한 일이기도 하지만 내가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한 세상 소풍처럼 살다가 포근히 잠들면 좋겠다. 그저 세상을 구경만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삶을 살아내는 태어난 아이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