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 어떤 방해도 없이 오롯이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이 얼마나 있을까.
혼자여서 너무 외로웠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신경 써야 할 사람도, 해야 할 일도 많아져 외로울 틈이 없는 것 같다. 좀 더 삶이 예전보다는 풍성해진 것도 같지만 그럼에도 난 여전히 혼자이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처절한 고독의 시간을 보내고 지금의 가족과 친구들을 꿈처럼 이루었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난 원래가 혼자인 것이 편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그것에 진저리가 나면 가끔 세상의 소요에 잠시 참여해 시끌벅적하게 있다가 다시금 동굴로 들어가고 싶은 그런 사람일런지도.
여기 이 그림책에서는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고 질문을 던진다. 내게 있는 하나하나 작은 감각을 깨우게 하는 이 책의 단순하지만 원론적인 질문에 난 떠오르는 대로 답해봤다.
오늘 하늘을 보았나요?
오늘 하늘은 흐리다. 그래도 반가운 흐림이다. 어제저녁부터 추적추적 비가 오고 있다. 손이 금방 푸석푸석해지던 건조함이 조금은 가실 것 같아 다행인 비다. 어제는 시부모님이 논에 모내기를 하셨다. 모내기를 하고 난 후의 비 소식이니 얼마나 반가운가. 뉴스를 볼 때마다 빈번히 나오던 화재 소식. 푸르던 산은 검은색으로, 여러 노동자가 희생당한 이 봄의 불난리가 이 비로 멈추기를.
아이는 비가 오니 부침개나 수제비를 해달라 말한다. 반죽이 필요한 번거로운 일이지만 날씨에 따라 특정한 음식이 벌써부터 생각나는 아이의 반사작용에 절로 웃음이 난다. 아이가 어서 자라 이런 날씨에 막걸리까지 부모와 함께 곁들이는 그런 날을 한번 상상해봤다.
좋은 하루란 어떤 하루인가요?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부터는 좋은 하루에 대한 어떤 강박 같은 것이 생겼었다. 아이에게 하나라도 더 좋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경험해주기 위해, 부모가 되었다면 하루라도 허투루 보내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주말에는, 휴가 때는 아이를 데리고 어디를 가야 할지 남편과 항상 머리를 맞대고 고심했다.
그러나 이제, 좋은 하루란 그저 아무 일도 안 일어난 평온한 하루이기를 바랄 뿐이다. 어떤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어도 우리 네 식구 아무 일 없이 건강한 하루를 보냈다면 그것으로도 좋은 하루임을 안다.
서로 그 자리에서 안전하게 함께 있는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 자체만으로도 고마워하며 서로를 대단히 위하는 가정을 꾸리고 싶다. 그런 마음을 가진 아이들로 키우고 싶다.
나무를 친구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받아 온 식물을 화분에 옮겨 심었다. 봄 새학기에 들어서면 매번 하는 교과 과정이다.
이번엔 홍콩야자와 나한송을 받아와 앙증맞은 빨간 화분에 제법 그럴듯하게 심어놨다. 등교하는 날에 교실로 가져가야 하니 그때까지 잘 돌봐야 한다. 엄마는 내심 아이가 식물을 소홀히 할까 봐 "수행평가이니 잘 기르라"는 잔소리를 덧붙였다.
아이가 커가는 만큼이나 해마다 화초도 늘어간다. 그럴수록 아파트 베란다는 삭막하지 않고 초록이 나름 우거지게 된다. 이 계절이 되면 자꾸 베란다 쪽으로 눈이 간다. 단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물이나 주는 정도의 수고만 할 뿐인데, 식물은 무럭무럭 잘도 자란다.
물과 바람과 햇빛의 적절한 조화는 베란다 숲을 점점 우거지게 한다. 그 풀들을 바라만 보기만 해도 그저 좋다. 마냥 신기하다.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진다.
"아름다워!"라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손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 엄마 품으로 뛰어가는 아이, 뺨을 스치는 따스한 바람, 끝을 모를 푸른 하늘에 새털 같은 구름이 흘러가는 것, 어떤 이해타산 없이 오직 당장의 생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많은 이웃의 누구들, 하늘을 황홀하게 물들이는 저녁노을.
그 앞에서 우리는 말문이 막히게 된다. 한없이 나 자신이 작아지고 여태 했던 고뇌는 한순간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순간 고요해지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경외감마저 들게 하는 그런 순간을 종종 우리는 경험한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가? 어렴풋하게 알고는 있지만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은 좀 더 상세히 그리고 섬세하게 나를 알고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신변잡기식의 바깥 얘기보다 나를 조금은 더 차분하게 한다. 어떨 때, 어떤 순간에 내가 행복하고 편안한지 다시금 깨닫게 한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새로운 감각을 깨워보자. 하늘을 언제 보았는지, 새소리에 귀를 기울여봤는지, 행복이 무엇인지,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나만의 나무는 있는지.
얼마 전 학교 등교일이 발표됐다. 그동안의 일상은 우리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었다. 이른바 뉴노멀 시대. 그렇기에 사소하거나 당연했던 그 예전의 일상과 그대로의 자연에 우리는 소중함을 더 되새기게 됐다. 하늘, 바람, 꽃, 빗방울. 자연이 매번 주었던 이런 것이 우리를 이제 더욱 행복을 느끼게 한다.
일상이 바뀌었다고 운동을 계속 미루며 핑계만 댔었다. 얼마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실내 사이클을 한 시간씩 하기 시작했다. 사이클은 나만의 나무가 있는 베란다 숲에서 이제 나만의 뉴노멀의 시작 중 하나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시 갈 수 있을 때, 다시 공원으로 산으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그 날을 위해 달려 보려 한다.
세상은 말을 가볍게 여기지요. 당신은 말을 믿나요?
여백이 가득한 수채화 그림으로 더욱 담백한 이 그림책은 내게 짧은 질문들을 던졌다. 그리고 난 이렇게 장황한 대답, 작은 도전으로 답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