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반도'에서 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by 윌버와 샬롯

싹둑 기사 1

아포칼립스(apocalypse) : (세계의) 파멸, (성서에 묘사된) 세상의 종말, 대재앙
포스트 아포칼립스 : 거대한 재해나 초자연적 사건으로 인류와 문명이 멸망하는 모습을 그린 장르


아포칼립스. 기사 제목에 떡하니 있는 이 용어가 솔직히 무슨 뜻인지 몰랐다. 영화 제목으로나 접했던 것 같은데, 친절하게도 기사에서는 그 뜻을 알려 주고 있다. 여태 심심치 않게 보았던 디스토피아적 미래 모습을 그린 영화가 이 장르에 속할 수 있을 것 같다.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관은 이야기가 끝없이 나올 수 있는 소재예요. 반도 이후를 다룬 영화가 나온다면 제목이 ‘반도2’는 아닐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해요. 하하.”
“후속편은 배우로선 호기심이 덜 자극되는 편이긴 해요. 감독님과 대화를 나누고 시나리오를 읽으니 한국에선 처음인 포스트 아포칼립스여서 보는 재미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부산행과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또 다른 세계관으로 확장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그려집니다.”
185개국에 미리 판매된 반도는 이달 아시아권 국가들에서 개봉하고 다음 달 7일 북미 극장에서 관객을 만난다. 최근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테넷’이 개봉을 연기하면서 반도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계 극장에서 개봉하는 첫 영화가 된다.


영화 '반도'가 한국 최초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라 한다. 올초 아카데미의 주연을 맡았던 한국 영화가 이 분야에서는 초행길에 들어선 셈인가 보다. 최초라는 의미까지 더해지니 영화 '반도'가 더 궁금해진다. 더군다나 세계 극장에서 개봉하는 첫 영화라니, 코로나19는 여러모로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고 있는 것 같다. 이야기 폭은 넓어지고 장르는 다양해져서 한국 영화의 저변이 세계 속으로 더욱 커져가길 바란다.



싹둑 기사 2

할아버지가 대인시장에서 수박을 고르신다
가운뎃손가락으로 수박을 툭툭 두드려 보고
"잘 익었다" 하시고

노점상 널조각 곁에 바짝 쪼그려 앉은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려 보고는
"아직 멀었다" 하신다

- 김정원 作 <팔월>


짧은 시지만 읽고 나면 할아버지와 손자가 장에서 골똘히 수박을 고르는, 마치 어느 드라마 한 장면처럼 분명 머릿속에서 누구나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위트가 있는 분이심에 틀림없다. 손자 머리를 툭툭하고 아직 멀었다는 멘트를 날리시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 말을 들은 손자 기분은 어땠을까. 할아버지 농을 깔깔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까. 보통의 할아버지라면 그렇게 손자에게 말할 수 있었을지. 어허둥둥 귀하게 여겨 그런 말은 잘 안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기사 제목을 검색하는데 똑같은 제목의 노래 하나가 뜬다. 가수 강산에 씨의 노래다. 익숙한 멜로디인데 가사와 함께 들어보니 시에 등장하는 할아버지와 비슷한 분이 등장하신다. 할아버지는 내기 장기 이기시고 어쩜 술 한 잔 걸치셨는지도 모르겠다. 기분 좋게 수박 한 통 사 오시는 할아버지 모습이 시와 동일한 정서를 풍긴다.


강산에, 할아버지와 수박

할아버지 그 하얀 수염 쓰다듬으시며 언제나 이웃 복덕방에 내기 장기 두러 나가셨지
해질 무렵 콧노래를 흥얼거리시고 큰기침하고 집으로 돌아오시던 그날
아마 내기 장기에서 또 이기셨나 봐 시원한 큰 수박을 양손에 들고 오시네
하하하 웃는 빨간 얼굴에 그 하얀 수염 울 할아버지 생각나네
울 할아버지 울 할아버지 보고 싶어 울 할아버지 울 할아버지 나의 친구
울 할아버지 울 할아버지 그리고 파란 수박 코가 찡하도록 생각나네

할아버지 그 하얀 수염 쓰다듬으시며 언제나 이웃 복덕방에 내기 장기 두러 나가셨지
해질 무렵 콧노래를 흥얼거리시고 큰기침하고 집으로 돌아오시던 그날
나는 즐거워하네 수박도 너무 크네 너무 잘 익었네 나는 기뻐하네
그런 나를 따뜻한 눈길로 어루만져 주던 울 할아버지 생각나네
울 할아버지 울 할아버지 보고 싶어 울 할아버지 울 할아버지 나의 친구
울 할아버지 울 할아버지 그리고 파란 수박 코가 찡하도록 생각나네


이 노래까지 들으니 마냥 자상하고 근엄한 할아버지보다는 가끔은 손자도 놀리면서 친구처럼 대해 주시는 할아버지가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과자도 먹고 그네도 타고 꽃밭도 거닐면서 그렇게 일상을 함께 공유하는 그림책 마레의 할머니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에 조부모에게는 이런 무한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초복도 지나고 매미가 시끄럽게 울기 시작한 이 여름 한낮에 수박이라도 시원하게 한 입 베어 물고 싶어 졌다.



싹둑 기사 3

강제로 운동을 시킨 생쥐의 혈액을 고령쥐에 주입하니 고령쥐의 뇌가 이전보다 한층 젊어졌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인간의 혈액을 활용해 노인이나 게으른 중년의 뇌 기능을 향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어서 주목된다.


눈에 띄는 의학 뉴스가 있다. 운동을 시킨 생쥐의 혈액을 고령쥐에 넣으니 젊어졌다 한다. 획기적인 뉴스다. 노화나 치매 같은 질병에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는 치료법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젊음은 인간이 바라는 신기루 같은 영원한 수수께끼일 줄로만 알았는데 기술의 발달은 그 영역으로 조금씩 가깝게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


갑자기 그런 영화도 떠올랐다. 부자 노인이 어떤 모종의 계약을 맺고 젊은이와 신체를 바꾸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 그래서 그런지 이 기사에서도 그런 스토리가 상상된다. 가난하지만 건장한 청년 그리고 치매 조짐이 보이는 재벌. 재벌은 그 청년에게 하루에 몇 시간씩 운동을 하게 하고 그 혈액을 정기적으로 제공받는다는 계약을 맺는다. 자식을 키우기 위해 피를 팔던 소설 허삼관매혈기와 같이, 살기 위해 미래에서는 운동까지 열심히 해야 혈액을 팔 수 있는 신허삼관매혈기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현상에서든 양면의 모습이 존재한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보거나 착취당하는 그 무엇이 분명 생기게 된다. 하루에 수키로 씩 달렸다는 실험 쥐의 모습이 그렇게 밝은 뉴스로만 보이지 않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싹둑 기사 4


아들이 가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친다. 피아노 학원에서 배우는 곡은 아닌 것 같지만 집에 있는 악보로 띄엄띄엄 연습을 해보는 눈치다. 월광 소나타는 달빛이 비치는 배경의 드라마나 영화에서든 많이 나오는 곡이니 아들에게도 익숙한 곡일 것이다.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 악성 베토벤, 음악의 아버지 바흐처럼 어릴 때는 작곡가 이름을 그렇게 외워버려 지금까지도 입에 착 달라붙어 있다. 아들이 피아노를 배우긴 하지만 내가 배울 때처럼 바이엘, 체르니, 소나타처럼 그 수순대로 배우는 것 같지는 않다. 지루함을 덜 느끼게 하려고 유행하는 가요나 연주곡, 팝송까지 중간중간에 재즈곡이라는 명목 하에 끼워 넣어 배우기도 한다.


어떤 교육방식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가끔은 아날로그 방식대로 배웠던 느린 교육방식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이가 조금 어려워해도 클래식을 클래식 원곡 자체로 배우면서 음악을 온전히 느끼기를 바란다. 돌이켜보면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거쳤기에 그나마 조금은 음악에 대한 귀를 트이게 할 수 있었고 클래식의 묘미를 조금은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다.


뮤지컬을 본 지가 언제인지, 아니 극장에서 영화를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보다 영화나 뮤지컬 한 편이 그 이상의 효과를 발휘할 때도 있다. 모차르트를 단박에 알기 위해서는 영화 아마데우스만 한 것이 또 있을까. 아직도 그 까랑까랑하게 웃던 모차르트를 더빙한 성우 배한성 씨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현장에서 보는 뮤지컬은 힘들지라도 관련 영화라도 찾아서 아이에게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듣지 못하게 되지만 명곡을 완성해내는 베토벤의 드라마틱한 삶에 피아노를 배우던 꼬마였던 난 그에게 가장 매료됐던 것 같다. 마치 내가 엘리제가 된 것처럼. 올해는 불후의 작곡가인 악성 베토벤의 탄생 250주년이다. 아이가 다음번엔 비창 소나타를 연습해봤으면 좋겠다. 그럴 때 한 번쯤 아이가 베토벤의 삶을 생각해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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