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은희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 예의 없는 사람들

by 윌버와 샬롯

러닝타임이 꽤 길어 보기를 여러 번 망설였다. 영화에 대한 정보는 94년도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모티브라는 것, 많은 상을 휩쓸었고 여러 사람들로부터 꼭 보라며 권유받던 것. 그것이 전부였다.


식구들이 왔다 갔다 하는 주말 낮에 영화를 틀었다. 조금 보다가 중단했다. 거실을 오가는 아이들과 옆에 있는 남편이 신경 쓰였다. 오롯이 혼자 봐야 할 영화 같았다.


며칠이 흐르고, 이 어두운 영화를 혼자 있을 때 다시 켰다. 보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15살 은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어서, 엄마라는 이름을 가져서 그런지 은희의 이탈이 그만 거기서 멈추기를 바라며, 그렇게 계속 조마조마했다.


영화를 다 보고 또 며칠이 지났는데 은희 주변 사람들이 떠올랐다. 모두 은희에게 예의 없던 사람들이.



당사자가 가까이 있는데도 험담을 하는 반 아이들. 들을 걸 뻔히 알면서도 수군대는 아이들.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가자'라고 복창시키는 담임. 반에서 날라리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적어내라고 시키는 담임.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무시하는 담임.


첫 입맞춤 후 어떤 말도 없이 갑자기 연락을 끊은 남자 친구. 그리고 다른 여자 친구를 만나는 남자 친구. 그러다 갑자기 은희 앞에 나타난 남자 친구. 얘가 방앗간 집 딸이냐며 60~70년대 촌스런 멘트 날리는 엄마 손에 이끌려 다시 떠난 남자 친구.


먼저 좋다고 다가온 여자 후배.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선배가 좋다며 은희에게 장미꽃 한 송이도 주고 볼에 뽀뽀도 서로 나눴는데 한 학기가 지나자 밑도 끝도 없이 다른 선배한테 붙은 여자 후배.


고막이 터질 때까지 은희를 때리던 오빠. 그 사실을 가족 앞에서 말했는데도 누구도 오빠를 혼내지 않고 묵인하는 가족.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고 계속 딴 곳만 바라보는 엄마.


가족에게 권위적이고 밖에서 춤바람이 난 아빠. 엄마를 때리는 아빠. 다음 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텔레비전을 사이좋게 보는 엄마 아빠.


영지 선생님과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을 은희에게 잘못 전달해준 원장 선생님.


열거된 이 모든 사람들은 은희에게 끝까지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감정만이 중요할 뿐이다. 반면 은희에게 아래 세 사람은 미안하다 말하고 힘이 돼주려 한다.



진단서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넌지시 얘기해주는 의사 선생님.


유일한 친구였던 지숙에게 은희는 배신을 당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지숙은 은희에게 용서를 빈다. 그때 너무 무서워서 그랬다고. 은희는 그런 지숙을 꼭 안고 같이 운다. 그리고 둘은 더 단단한 친구가 된다. 서로의 단점을 얘기하면서도 다시 손을 잡아 이끄는 진짜 친구로 말이다.


가만히 옆에서 은희 얘기를 들어주던 영지 선생님. 다시는 맞지 말라고, 어떡하든 맞서라고 말해주던 영지 선생님. 만화가가 되고 싶은 은희 꿈을 알고 스케치북을 선물한 영지 선생님. 미처 말하지 못하고 떠나서 미안하다고 편지를 보낸 영지 선생님.



아빠는 수술을 앞둔 은희 옆에서 아이처럼 엉엉 운다. 엄마는 어느 날 은희에게 감자전을 부쳐주고 맛있게 먹는 은희를 보며 미소 짓는다. 오빠는 다치지 않은 누이들을 보며 밥상 앞에서 오열한다.


그들은 울거나 먹을 것을 주는 방식으로 은희에게 사과하는 듯하다. 그러나 아무리 가족이라도 그거 가지고는 안되지 않을까. 미안하다고 직접 은희에게 말을 했어야 한다.


지숙에게 쫓아 가 왜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듯이 은희는 그 모든 무례한 사람들에게 내게 왜 그러냐고 똑똑히 물었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상대가 상처 받는 줄 결코 모를 테니까.



인생은 참 얄궂다. 은희가 마음을 열고 표현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대는 말없이 떠난다. 남자 친구도, 여자 후배도, 영지 선생님마저. 유일하게 속마음을 터놨던 영지 선생님이기에 은희는 더 혼돈이 왔으리라. 원장 선생님에게 그래서 더 그 울분을 내뱉었던 건 아닐까. 조금은 늦은 영지 선생님의 마지막 인사가 그나마 은희에게 위로가 됐을까? 은희를 조금은 성장할 수 있게 도왔을까?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그 자체로 빛이 나는 존재라는 걸 은희가 알았으면 좋겠다. 누구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아도 은희 스스로가 자신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다리가 무너지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는 이 세상에 지거나 수긍하지 않고, 발을 쿵쿵 구르고 소리를 지르고 이유를 묻는 은희가 되기를 바란다.


자기를 좋아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아.
나는 내가 싫어질 때 그냥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해.
'아, 이런 마음들이 있구나. 나는 지금 나를 사랑할 수 없구나'하고.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때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거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마음을 보듬어 줬던 영지 선생님이 은희에게 잠시나마 머물렀던 것은 다행일까. 그 시간이 짧아서 안타깝지만 은희는 힘들 때마다 자신과 같았던 왼손잡이 선생님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선생님처럼 손가락을 움직일 것이다.


알 것 같아도 정말 모르겠고,
나쁜 일이 닥치면 기쁜 일들이 함께하는 것


영지 선생님은 인생을 이렇게 얘기한다. 알다가도 모를 인생. 이 세상 어느 누구나 나름의 사정이 있다. 초당 수십 회 날갯짓을 하며 꿀을 먹어야만 하는 벌새처럼 삶의 버거움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 모두가 애달프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까운 이에게 내 힘듦의 울분을 함부로 흘려서는 안 된다. 본인보다 약한 존재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사과하는 남자 친구에게 그럴 필요 없다며 너를 좋아한 적도 없으니 상관없다고 가차 없이 내친 은희처럼 예의 없는 그 모든 것에 우리도 대차게 발차기를 하자.


그 자체로 아름다운 우리 모든 은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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