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던 아름다운 밤을 기억한다. 그날은 흔하지 않게 눈이 펑펑 오던 밤이었다. 아이 없이 남편과 둘만 살던 때였다. 이곳에 이사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때였던 것 같다. 그 눈부신 밤을 집에서만 보기가 아쉬워 우리는 아파트 주위를 산책하기로 했다.
늦은 밤 인적이 없는 우리 둘만의 산책,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 나무들 위에 핀 반짝반짝 눈꽃, 길지 않은 아파트 단지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했다. 그 감탄스러운 순간을 우리만 보기가 아까웠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가까이 사는 친정 오빠에게 연락했다.
오빠, 얼른 나와 봐. 밖이 너무 예뻐.
오빠와 올케언니, 그리고 그때쯤 서너 살 먹었을 아기 조카가 내 부름에 응답했다. 엄마와 아빠를 사이에 두고 두 손 꼭 잡은 꼬마 천사는 눈길을 뽀드득뽀드득 조심스레 걸었다. 좋은 것을 좋다고 순간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할 줄 아는 오빠는 나처럼 눈의 향연을 연신 만끽했다.
낮보다 환했던 그날 밤이 지난 지 15년도 더 지났지만 이후 그렇게 기억에 남는 눈이 오는 밤은 더 이상 내게 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눈은 언제나 그렇게 왔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날의 기억이 내게 특별한 것은 아마도 젊은 날 해사한 눈꽃 아래에서 평화롭게 함께 걷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그 순간의 찬란함 때문이지 않을까.
조카는 그날의 그 밤을 기억할까. 어렸던 아이와 손잡고 걷던 그 밤을 오빠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태어나 가장 많은 눈을 보았을 그때의 꼬꼬마 조카는 어느새 올해 대학생이 되며 새롭게 맞이할 치열하고도 눈부실 젊음의 나날을 기대하고 있다.
어느 고요한 겨울이었습니다.
곰은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꼬마 늑대였지요.
곰과 늑대는 젖은 나무껍질 냄새를 맡았습니다.
곰과 늑대는 호수 가운데까지 걸어갔습니다.
"함께 걸어서 정말 좋았어."
그럼 우리 함께 걸을까?
어느 고요한 겨울 깊은 밤 숲속에서 눈이 오는 날, 그림책 『산책』에서는 곰과 늑대가 만난다. 현실에서 곰과 늑대가 실제로 맞닥뜨린다면 어떤 상황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그림책에서 그 둘은 함께 눈밭을 걷는다.
눈과 귀와 코로 눈 내리는 풍경을 느꼈습니다.
같을 것을 볼 줄 안다면 본질이 서로 어떻든 그 순간을 함께할 수 있으리라.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 느낌을 고요히 공유하며 곰과 늑대는 하나가 된다. 그리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같은 방향으로 왔다가 뒤를 돌아 서로 반대 방향으로 헤어진다. 서로 다른 둘은 함께 걸었던 시간을 소중하게 가슴속에 담아두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 온갖 소리와 향기로 가득 찬 울창해진 숲에서 곰과 늑대는 다시 만나게 된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둘은 살랑거리는 봄바람 속을 함께 걷는다. 그 둘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달라진 것은 단지 그들 주변의 배경색이 하양에서 초록으로 바뀌었다는 것뿐. 그 둘의 발자국은 또다시 겨울이 되면 나란하게 또렷이 새겨질 것이다.
그림책 『산책』은 겨울에서 봄, 무채색에서 유채색으로의 전환이 돋보이는 책이다. 다시 올 연둣빛 계절에 봄바람 맞으러 어디고 떠나고 싶게 만드는 그림책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옆에서 내 마음과 같을 그 누구와 함께 산책하고 싶게 하는 그림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