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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버와 샬롯 May 08. 2023

나의 옥상

: 숲에서 보낸 마법 같은 하루

몇 살이었을까? 열 살이나 열한 살쯤이었을까? 정확한 때를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 하루의 장면은 어릴 적 몇 안 되는 기억 중에 고스란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피아노를 국민학교 1학년 때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는 매일 한 장씩 집으로 배달오던 일일 학습지 아이템플 빼고는 어릴 때 받은 유일한 사교육이었다. 예술 쪽은 처음이었고 형제 중에서도 피아노를 배운 건 오직 나 하나였다. 그건 순전히 언니 덕이다. 막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자고 이미 성인이던 언니는 엄마를 설득했다. 물려받지 않은 나만의 새 동화책을 사주던 이도 언니였다. 자신은 누리지 못한 걸 언니는 막내 여동생만이라도 배우게 하고 싶었던 걸까? 나중에 언니를 보면 물어봐야겠다.


일주일에 5일은 피아노 학원에 갔다. 60분을 꼬박 채워야 하는 레슨 시간이 쉬이 가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나마 위안이 레슨을 기다리며 보물섬, 점프 같은 만화 잡지를 보는 거였으니 다달이 새로 나오는 만화책을 보는 게 학원가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가끔은 클래식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음악 감상회 시간도 있어 휴일마저 학원에 가기도 했었다. 가정집에서 피아노도 몇 대 안 되는 지방의 작은 학원이었지만 교육에 진심이던 젊은 선생님은 서울의 유명 호텔에서 하는 콩쿠르에 원생들을 손수 데려가 참가시키기도 했다. 아마도 서울 구경은 짧게나마 그때가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무척 높게 보였던 호텔 외관과 널따란 대회장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있는 걸 보면 수도 서울은 어린 나를 충분히 압도하고도 남았다.


피아노를 배운 지 3년이 지나고 4년이 되었을까? 10대 초반 짧은 인생 중에 그 세월은 어쩌면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하농의 반복되는 선율로 손가락을 푸는 것을 시작으로 부르크뮐러, 명곡집, 소나타로 이어지는 뫼비우스 띠 같은 연습의 쳇바퀴가 오죽했을까. 듣는 귀는 높아만 가는데 치는 실력은 그만큼 따라주지 않으니 더 그랬을지 모른다. 한가한 시절 유일하게 다니는 학원이라 가기 싫어도 빠질 핑계가 마땅치도 않았다.


그날은 정말 학원에 가기 싫었다. 꾀를 낸 게 학원에 간 척했다. 그렇다고 어디 따로 갈 데가 있었을라고. 술래 없는 혼자만의 숨바꼭질, 숨기로 했다. 다른 데도 아니고 바로 우리 집 옥상에서 한 시간 동안 조마조마하며 시간을 보냈다. 농땡이라는 걸 해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았을까. 그 깜찍한 속임은 당연히 금세 탄로가 났다. 선생님이 집으로 전화할 거라고 왜 생각을 못 했을까? 순진하기도 하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해진 시간이 지나 집으로 들어가니 엄마는 난리였다. 빗자루를 들고 쫓아오는 엄마에게 난 요리조리 도망쳤다. 내 바로 위 오빠는 두둔해주려고 그랬던 건지 아니면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드러난 거짓말에 약 올리려고 그랬던 건지 나와 엄마를 따라 이리저리 뛰었다. 남매와 빗자루를 든 엄마는 꼬리잡기 놀이처럼 이리저리 서로 잡으려 날뛰었다. 학원 하루 빠지고 집에서 맞이한 블랙 코미디 같은 웃지 못할 풍경이었다.


어느 틈엔가 피아노는 시큰둥해졌다. 변화를 주고자 학원을 바꾸기도 했지만 거기도 그리 오래 다니진 못했다. 난 결국 최초의 인생 스승이기도 했던 한 분의 선생님께 5년 동안 배운 셈이고 이후로는 피아노를 배우지 않았다. 아마도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을 시기였을 것이다.


오늘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원을 빠지지 않고 원래대로 갔었다면 그날의 장면이 내 기억에 남게 되었을까? 빗자루를 든 엄마는 쫓아오고, 오빠는 약 올리고, 나는 분해서 앙앙 울고, 코믹 만화 한 장면 같은 어느 날의 모습. 희미해져 가는 엄마와의 기억에서 그나마 한 꼭지 더 남아 있는 게 다행인 것이 아닌가 하고.



다 왔어요. 전에도 왔던 곳이죠.


엄마는 매일매일 말없이 글을 쓰고 나는 화성인들을 죽여요.


나는 엄마 몰래 게임기를 다시 챙겨서 밖으로 나갔어요.


 

나는 나무에 올라가 먼 곳을 바라봤어요.


그림책 『쏘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의 쏘피는 커다란 밤나무에 올라가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고 기분이 풀어져 가족이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 책은 얼마나 자연이 위로가 되는지, 언제나 그렇듯 자연이 옳음을 다시 깨닫게 했다. 그림책 『숲에서 보낸 마법 같은 하루』에서의 아이도 쏘피처럼 나무에 오른다. ‘왜 전에는 해 보지 않았을까’하고 의문이 들 정도로 아이는 자연이라는 신기한 세상에 푹 빠지며 마음이 한결 편안해짐을 경험한다.


한차례 도피처가 되기도 한 옥상이 내게 그랬다. 옥상은 안식처이기도 했다. 독수리 5형제가 함께 사는 대가족 집에서 나만의 독방이 있을 리 만무했다. 혼자 있고 싶을 때 춥지 않은 계절이면 나는 종종 옥상에 올라 평상에 누워 하늘을 봤다. 구름이 그렇게나 빨리 흘러가는지 옥상이 알려줬다. 구름이 그린 동물에 이름을 찾아주는 건 외로운 아이의 소일거리 중 하나였다. 기다랗게 맨 빨랫줄에서 하늘하늘 바람에 날리는 빨래를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눈이 온 아침이면 맨 먼저 옥상부터 올랐다. 눈이 부시게 변한 하얀 세상을 유일하게 내려다볼 수 있던 곳도 옥상이었다. 내게 옥상은 그렇게 쏘피의 밤나무 같은 마법의 장소였다.


어어…… 아빠 얼굴이 보였어요.
아빠의 환한 미소도 거울 속에 있었고요.


아빠의 부재를 아이는 그래도 어떻게든 견뎌낸다. 화성인들을 죽이는 게임기로, 비 오는 날 자연에서의 뜀박질로, 바쁘긴 하지만 엄마가 타준 따끈한 코코아 한 잔으로, 그리고 가만히 바라보던 서로의 눈맞춤만으로도, 아이는 마법 같은 하루를 때때로 맞을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는 어느새 아빠만큼 자라있겠지.


나도 자랐다. 몇 년만 더 지나면 엄마가 산만큼의 나이를 먹게 된다. 어느 날에는 내가 보는 거울 안에서 엄마의 얼굴과 만날 수 있겠지. 빗자루를 든 건 아니지만 가끔은 송곳 같은 말로 아이 가슴을 후비는 그런 엄마가 나는 되었지. 그렇게 세상의 모든 따분함이 모여든 날이 오면 우리 아이는 어디로 피신할까? 우리 아이에게도 자기만의 나무와 옥상이 있을까? 부디 그러길. 그러면 돌아온 아이에게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이라도 타주며 말없이 바라봐주는 엄마라도 나는 되어야겠지. 부디 그러길.


오늘은 그렇게 피아노와 옥상과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 안녕!


이미지 출처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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