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화가

: 선

by 윌버와 샬롯

어린 화가들에게... 작가는 그림책 <선>의 시작을 이 말로 시작한다. 나도 어린 화가다.


어린 화가들에게 - 이수지


처음부터 그리는 게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순정 만화 캐릭터를 잘도 그리는 친구를 따라 코가 뾰족한 사람 옆모습을 많이도 연습하며 그리던 때가 있었다. 음영이 명확한 소묘가 근사해 사각사각 연필 선을 열심히도 긋던 때도 기억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미술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아무래도 기가 죽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싶은 건 이건데, 보는 눈도 있는 편인데, 결코 결과물은 그렇게 나오지 않으니 속상했을 것이다. 왜 나는 자연스럽게 수채효과를 내질 못하는가. 저 기법은 어떻게 해내는 걸까. 뚝딱 하고 그려낼 수 있을 줄만 알았다. 불평만 있을 뿐 연습과 시도는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리고 그리고 지우고 지우고 칠하고 칠하고 망치고 망치고, 그런 과정을 거쳤어야만 했다. 내가 원하는 그림을 얻기 위해서는 말이다.





책방에서 일 년 가까이 필사모임을 했다. 기억하고 싶은 책의 구절을 누구는 반듯하게 글로 썼고 나는 그림책의 한 장면을 골라 그리고 색칠했다. 따라 그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나름의 도전이었다. 상상해서 무언가를 그린다는 건 여전히 내게는 힘든 일이지만 모사 또한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글씨도 예쁘게, 그림도 멋들어지게 그려내는 참여자들 사이에서 난 마음이 조급했다. 허겁지겁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다행히도 결과물에 집착하던 마음이 조금씩 사그라졌다. 못 그려도 괜찮아, 어쨌든 난 완성하게 될 거야, 공간과 친밀함의 안전에 기대어 뻔뻔함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참여자들의 칭찬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어머, 잘 그리셨는데요?” 세상에나, 살면서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듣다니! 물론 오구 오구 잘한다 잘한다, 응원의 말임을 왜 모르겠나. 그래도 칭찬은 춤이라도 출 수 있을 만큼 달콤했다.


더러 마음에 쏙 든 그림도, 그렇지 않은 그림도 있지만 한 장 한 장 그것들이 쌓이니 내가 봐도 그럴듯했다. 하다 보니 뭐가 되긴 되는 거였다. 급기야 난 그림책 북토크 외부 강의 때마다 필사노트를 내보이기까지 한다. “저 그림 정말 못 그리는 사람인데요. 이만큼 쌓였어요. 괜찮죠? 여러분도 한번 해보세요.” 하고 말이다. 참 낯도 두껍지.



빌려 쓰는 아들의 36색 색연필을 넘어 이제는 다른 미술도구도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사인펜도, 오일파스텔도, 종국엔 수채물감까지. 싫었던 ‘그리는 행위’는 필사라는 형태로 당분간 노트를 채울 것이다. 빙그르르 김연아 선수처럼 멋들어진 선은 아닐지라도 두렵기만 했던 하얀 종이 위에서 즐길 줄 아는 마음이 이제는 좀 생긴 것이다. 어때요? 이수지 작가님. 나도 어린 화가가 맞지요?


이미지 출처 : 알라딘


나의 그림책 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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