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 참깨, 뚜껑!

: 내가 다 열어 줄게

by 윌버와 샬롯

오랜만에 간 대형마트에서 병에 담긴 할라피뇨를 발견했다. 나 빼고 가족 중에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식품이지만 가격이 착해 카트에 얼른 담았다. 나만 먹지 뭐. 반기며 살 때는 언제고 나만을 위한 음식을 꺼내기가 그랬는지 집에 와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한참을 잊고 있었다. 혼자 점심을 먹으려는데 ‘아, 맞다. 내겐 할라피뇨가 있었지.’ 느끼한 음식에 가볍게 알싸한 이것과 함께라면 괜찮겠다 싶었다. 짠 하고 개봉하려는데, 슬픈 예감은 왜 빗나가지 않는 건지 열리지 않는다.



유리병 뚜껑을 돌려서 열어야 할 때 살짝 긴장이 되는 편이다. 악력이 약한 건지 좌절될 때가 꽤 있기 때문이다. 소스 통을 열지 못해 요리의 중간 과정에서 급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잠시 유보할 때도 있었다. 최후의 필살기인 고무장갑까지 장착하고 시도했지만 꿈쩍도 안 한다. 이번 할라피뇨도 결국 먹지 못했다. 뭐 그렇지. 세상이 내게 어디 그리 호의적이었나. 새삼스럽게.


하교하고 돌아온 두 아이에게 이른 저녁을 차려주며 대뜸 병을 내밀었다. 이것 좀 열어주라. 어느새 엄마보다 키도 힘도 세진 아이들은 다른 것에 비해 이런 요청은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까짓 거 제가 해 보이겠어요,라는 짐짓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병을 잡아든다. 아이들은 뚜껑이 열리는 순간 들리는 펑 소리에 희열을 맛보는 건지, 엄마보다 우위를 점하는 어쩌면 어른과의 힘의 대결에서 승리를 만끽하는 건지, 여러 번 도움이 되긴 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하고 그게 뭐라고 뚜껑 여는 것에서마저 아이의 성장을 대입시켜 부모로서의 소소한 뿌듯함을 나 역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근데 이번은 좀 다르다. 쉽지 않은지 두 녀석 다 어색한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아휴, 됐다. 그만둬. 다칠라. 여러 번 만류했지만 세상사 다른 곳에선 쉬이 얻지 못하는 승자의 기쁨을 보상받고 싶었던 건지 딸아이는 부엌을 여러 번 들락거리며 시도해 본다. 요지부동인 병은 끝끝내 아이들을 패잔병으로 만들었다.


역시 그 사람뿐인 건가. 우리 집 맥가이버 님. 우리 집 금손 님. 마지막 등판 선수는 퇴근한 남편이다. 그 또한 별거 아니라는 듯 그동안 적립했던 성공의 전리품인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병을 잡는다. 어라? 얘가 뚜껑 크기가 좀 애매하네. 끙끙. 뚜껑이 문제 같은데. 손에 꽉 잡히는 것도 아니고 좀 그러네. 변명을 하기 시작한다. 말이 많아진다는 건 꽤나 당황했다는 증거. 그럼에도 우리 집 삼손 님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결국 성공하시어 내게 할라피뇨를 허락하셨다. 할렐루야.



세상 뭐든 펑하고 금방 뚜껑이 열리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런 능력자라면 또 얼마나 속이 다 시원할까.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부탁하는 것도 마뜩잖은데 그거 하나 열어줬다고 고맙다는 인사까지 바라는 엄마의 태도라니, 참 세상 치사하다고 아이는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어릴 때는 그랬다. 어리다는 이유 하나로 혼자서 할 수 없는 것, 상황을 내 능력으로 헤쳐 나갈 수 없다는 무력함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른 어른이 되게 해 주세요’ 기도한 적도 많았다. 그땐 몰랐지. 어른이 되었다고 그 모든 뚜껑들을 다 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그때보다야 열 수 있는 게 많아져 난 지금이 좋다. 설령 못 연다 해도 도와달라고 주변에 말할 수 있는 깜냥이 생겨 또 그것도 좋다. 영원히 열지 못할 유리병이 내 앞에 가득 쌓여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는 거겠지 하는 포기하는 마음도 나름대로 좋다. 느리게만 간다고 생각했던 무심했던 시간들은 열려라 참깨 주문들을 하나씩 하나씩 알려주고 있었나 보다. 그건 아마도 나이 듦의 유일한 선물이지 싶다. 열리지 않는 뚜껑들을 앞으로도 만나겠지만 때가 되면 열릴지 모른다는 희망을 시간의 힘에 기대 본다.


아빠는 웅이가 다 클 때까지
함께 여기저기에서
많은 것을 열어 보고 싶어.
그리고 여러 가지 물건 여는 방법을
하나씩 가르쳐 줄 거야.


이거야말로 부모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책무가 아닐까. 난 잘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뚜껑을 여는 것에마저 삶의 통찰과 다정함과 유머까지 선사하는 요시타케 신스케에 난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찌익, 벌컥, 팡, 퐁... 글자로 보이는 그 여럿의 열리는 소리들은 탄산수 ASMR처럼 생생하게 귀에 들렸다. 마치 내가 해낸 것처럼 짜릿하고 통쾌하게. 그는 말했다. “보통 아이가 열심히 노력해서 끝내 문제를 해결했다는 내용을 바랍니다. 하지만 저는 인생은 비틀거리거나 절망할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요시타케는 이 책에서도 말하고 싶은 것을 훌륭하게 보여줬다.



맛있는 할라피뇨의 유통을 위해 엄격하게 밀폐를 유지해야 함은 필연. 그만큼 오픈하기는 쉽지 않지만 아래 방법을 따라 하시면 쉬워요. 넓적한 일자드라이버, 혹은 커피스푼 등을 뚜껑 아래쪽 틈으로 넣어 지렛대처럼 살짝 누르면......


뜯어지지 않는 과자봉지를 남편에게 내밀다가 온라인 상품 설명 페이지에 있는 위 문구를 우연히 봐버렸다. 원래가 손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다음번엔 나도 열 수 있겠다!


이미지 출처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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