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로 난 줄 알았지

: 수박이 먹고 싶으면

by 윌버와 샬롯

어느 날 오빠랑 나, 우리 둘은 전화기 너머로 꺼이꺼이 울었다. 오빠가 나를 안고 울던 마치 엄마가 돌아가신 오래전 그날처럼. 식구들 이야기를 하다 이른 나이에 부모를 여읜 설움이 대화 중에 폭발해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난 말했다. 난 혼자 자란 거나 마찬가지야. 그럼에도 이만큼 살아낸 내가 자랑스러워. 내가 기특해. 오빠는 답했다. 그래, 너 참 잘 살고 있어.



내가 알아서 해요.

내가 그랬듯 내 아이들도 그런다. 동기는 무척 다르지만. 난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5분 대기조 부모가 항상 옆에 있는 아이들은 구태여 혼자를 자처한다. 한 가정에서 세상의 중심이 어린아이들인 건 어쩌면 지금의 핵가족 시대엔 당연한 것. 그러나 그건 내가 누리지 못한 분명한 최고의 호강. 아이들은 아직도 사춘기인 건가. 난 그런 시절, 받아줄 사람도 없는데 뭐 그런 게 있었을라고. 아이들은 그 시절이 좀 길기도 한데 여태 혼자 자란 듯 부모의 관심은 귀찮은 간섭으로 받아들인다. 활짝 열려있던 방문은 닫히고 자기만의 왕국을 건설한다. 섭섭한 부모는 그 안을 자꾸 비집고 들어가려 하고 부모랍시고 공치사도 가끔 늘어놓는다. 너를 어떻게 낳았는데, 키우는 건 또 어떻고.



수박이 먹고 싶으면
옴질대는 싹눈이 마르지 않게
날마다 촉촉이 물 뿌려 주되,
수박 싹 제가 절로 난 줄 알도록
무심한 듯 모른 척해 주어야 한다.


부끄러워진다. 무심한 듯 모른 척해 줬어야 했는데. 수박에게마저 이 정도인데 하물며 사람 한 명 키우는 건 어떻겠는가. 나라고 또 뭐 그리 다른가. 딱 그 수박 싹이다. 나도 절로 난 줄 알았다. 속상해서 퍼부은 말에 오빠는 속으로 얼마나 기가 찼을까. 네가 절로 났다고? 어찌 혼자 날 수 있을까. 어찌 혼자서 살아올 수 있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는 건데. 나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닌데. 좋든 싫든 내 몸과 마음 어디 하나 영향을 받지 않은 데가 없을 텐데. 부모와 형제들 그 안에서 버무려져 그저 나라는 객체가 되었을 뿐인데.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독립 후 형제간의 생각은 같을 때도 다를 때도 있어 웃을 때도 있고 싸울 때도 있는 것. 그건 어찌 보면 누구나의 집에서나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그만하길 다행이다, 라며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사는 것이 삶을 건강히 이어가는 방법 아닐까. 그랬기에 우리 아이들은 나만큼의 외로움 같은 건 알지 않아도 되었던 거겠지. 아이를 가질 때부터 단 하나의 약속은 지키려 했다. 적어도 있어야 할 자리에는 꼭 곁에 있어 주겠다는. 그들에겐 투정 부릴 대상이 있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눈물을 짜고 하루 지나 오빠한테 짧은 편지를 썼다. 언니오빠들이 든든해서 참 좋았다고. 그래서 어디서도 기죽지 않으며 살 수 있었다고. 오래오래 내 옆에서 건강하게 살아달라고. 오빠는 답장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쩐지 눈에 선했다. 잔정 깊은 오빠가 이번에도 역시 어디에선가 조용히 눈가가 촉촉해졌을 것임을.


올해는 아직 수박을 먹지 못했다. 지난밤 첫 열대야를 치른 오늘은 수박을 사러 시장에 가야겠다. 칼도 닿기 전에 쩍 아낌없이 나눠 주는 수박 단물을 아이들에게 우리 오빠에게 선사해야겠다. 무심한 듯 모른 척하며, 나도 옆에서 한 입 베어 먹어야지. 아사삭!


이미지 출처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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