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걸맞은 행동,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걸맞다는 규정 자체가 모순이다. 어떤 행동이 어린아이여서 가능하고, 조금만 앞가림을 할 나이만 돼도 유치함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
지금 이 나이에 이걸 해도 되는 걸까?
99세 생일을 앞둔 할머니가 있다. 그 연세에 자신을 위한 케이크를 손수 준비하는 것도 흔치 않을 터, 그럼에도 할머니는 고양이가 자꾸 이것 좀 같이 해보자고 하는 말에 주춤한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인 걸.
그래서요, 할머니? 아직 당신은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고 호기심이 가득하잖아요.
고양이는 실수로 케이크에 꽂을 양초를 5개만 가져온다.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다며 할머니는 5자루 초를 케이크에 꽂고 99번째 생일을 스스로 축하한다.
1살, 2살, 3살, 4살, 5살. 5살 생일 축하해.
다음 날 아침, 같이 고기 잡으러 나가자는 고양이 말에 할머니는 말한다.
하지만 나는 5살인걸. 어머, 그렇지! 5살이면, 고기 잡으러 가야지.
갑자기 할머니는 5살 아이가 되어 어제까지 가졌던 주저함을 벗어던진다. 폴짝 뛸 수도 있고 물고기도 기똥차게 잡게 된다. 할머니여서 하지 못했던 일이 하루아침에 가능해졌다.
전환점.
할머니에게는 5자루 생일 초가 그 단초가 되지 않았을까. 고양이의 여러 제안에 이미 가슴 깊은 곳에서는 '혹시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번 해볼까.'하고 갈등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망설임에 나서지 못했을 뿐이다. 아무도 할머니도 할 수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본인도 그 너머를 감히 넘어서고자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할머니니까 콩코투리를 까는 거지. 할머니니까 낮잠이나 자는 거지. 할머니니까 케이크를 잘 만들 수 있는 거지.' 하며 자기를 규정해 버렸다.
그렇지 않은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변하지 못한다. 다만 눈치채지 못할 기회의 순간이 올뿐이다. 그 작은 순간을 잡는 자, 그렇지 못한 자가 있다. 할머니는 5개 초를 후 부르며 동시에 그렇게 단정해 버린 할머니 모습을 벗어던지고 5살이 되기로 선언한다.
청년보다 더 잘 뛰는 할아버지 마라토너, 스카이 다이빙을 하는 할머니, 이제는 전 세계 셀럽이 된 어느 유튜버 할머니, 세상에는 그렇게 나이를 초월한 분이 많아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일이 조금은 흔해지는 세상인 것도 같다. 그러니 도전함에 있어 나이를 핑계 삼지 말아 보자.
하지만 또 그런 생각도 든다. 죽을 때까지 꼭 거창한 도전을 하면서 살아야만 할까. 그냥 내 맘 편하게 사는 게 삶에 대해 직무 유기한다는 죄책감을 꼭 느껴야 하는 걸까. 발전과 성장을 강요하는 세태가 피곤하기도 하다. 그저 소소한 스스로만의 방식으로 삶을 즐기면 되는 거 아닌가. 누구나 모두 마라톤을 뛰거나 스카이 다이빙을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자기만의 소박한 소망을 이루기에 훗날 나이 때문에 못했다는 변명은 적어도 하지 말자는 거다.
할머니와 동거하는 고양이를 굳이 '씩씩한 수컷 고양이'로 쓴 것은 좀 불만이다. 같은 5살 고양이라도 암컷이었다면 할머니에게 동기 부여를 할 자격이 안됐을까. 씩씩한 수컷 고양이의 대척점에 나약함을 규정하려 '나이 든 여자'를 장치했음이 살짝 보인다. 그저 암수 구별 없이 5살 고양이에 나이 든 할아버지가 그 상대로 나왔으면 좀 더 멋지지 않았을까 싶다. 이 작은 그림책에서 내가 너무 멀리 나간 걸까.
저어, 나 어째서 좀 더 일찍 5살이 되지 않았을까.
'할머니, 지금도 늦은 거 아니에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만날 수 있을 때 만나지는 것, 인생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
앞으로 더 신나는 많은 걸 하게 될 할머니 앞날에 건투를! 그리고 주저했던 어떤 것을 다시 하고픈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도 5살이 될 용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