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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 있는 Dec 02. 2020

너무 그러지 마세요


주말에 부모님을 모시고 태안에 다녀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태안에 있는 간월도를 찍고 왔다. 부모님을 모시고 간 여행이라는 말 대신 찍고만 왔다는 건, 분명 가긴 갔는데 간월도에 대한 인상이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남은 기억이라고는 서울에서 간월도까지 3시간 넘시간 동안 코끝을 찌르는 악취가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릴 뿐이다.

  

간 적 없고, 알지 못했던 간월도에 처음 가게 된 건 오랜만에 외삼촌을 뵈러 가는 길이었다. 가보고 싶다는 엄마와 억지로 가시는 아빠를 모시고, 외삼촌이 가꾸시는 논밭을 둘러볼 겸 바닷가를 구경하고 올 속셈이었다. 그런데 부모님을 모시러 간 순간부터 들뜬 나의 마음은 깨어지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박스가 들려있었다. 박스 안에는 며칠 전 김장하느라 솎아낸 배춧잎부터 쪽파, 마늘 껍질이며 다 나열할 수 없는 김장하고 남은 잔여물이 한데 버무려져 봉지로 꽁꽁 묶여 있었다. 그야말로 음식물 쓰레기. 난 예상치 못한 음쓰의 등장에 눈이 커져 물었다. 엄마는 눈 하나 깜짝 안 하시고, 이 정도면 쓰레기 처리비용이 만원도 더 넘게 나오는데 논밭에 버리면 거름이 된다고 하신다. 장시간 차 안에서 마스크를 쓰면서 가고 싶지 않았다. 마스크를 써도 쾨쾨한 냄새가 진동하는 차 안에서 견딜 자신이 없다. 아이들도 냄새가 난다고 아우성친다.

   

당혹스러웠다. 후각에 대한 열렬하고 지독한 고문 아닌가. 당장 버리고 가자고 사정했다. 아빠와 엄마는 동시에 “만원이 얼만데!”라고 외치셨다. 내 의견은 묵사발이 되었다. 만원이라는 말에 크게 반박하지 못하고 차는 출발했다.


음쓰의 냄새는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나의 고통을 비웃듯 냄새는 스멀스멀 끼얹었다. 자식, 손주의 울상보다 소중한 만원이라는 가치는 도대체 얼마일까. 부모님에게는 거름이 되고 돈도 아낀다는 논리가 얼마나 타당하기에 아무리 말해도 들리지 않는 걸까. A급 사과를 사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 엄마가. 무려 그 사과를 깎아 드시지 않고 아침마다 갈아드시는 엄마가. 난 돈이 아까워서 사 먹지 못하는 비싼 사과를 펑펑 나눠주시는 엄마가. 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은 그토록 주관적이 되는 걸까.


냄새만큼 침울해졌다. 야속한 마음이 뒤엉킨 음쓰처럼 삭혀지고 고약해졌다. 잊고 지낸 어린 날이 떠올랐다. 돈을 버는 아빠는 왕이고, 왕을 떠받드는 엄마. 부모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정 분위기. 자본주의와 경제 원리에 따라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없었던 이해관계. 가족여행을 못 가도, 생일파티를 못 해도, 외식을 못 해도 바랄 수 없었던 가족의 부재. 근면 성실하게 일하시는 아빠를 보며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 건지 통용되었지만 자식의 욕구는 배재되었던 일상. 아빠 덕분에 어느 면에서는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았지만 나의 목소리는 없었다. 오늘처럼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듯이. 멀미가 났다.


논밭에 도착했다. 엄마는 둘러보시더니 대뜸 나보고 버리라고 하신다. 화를 내도 모자란 판에 손까지 묻히라니. 난 못 들은 척했다. 결국 부모님이 갖다 버리셨다. 버리면 냄새가 사라질 줄 알았는데 음쓰가 묻어난 비닐봉지는 돌아오는 길에도 얼마나 괴롭히던지. 꾸릿꾸릿 흐르는 국물처럼 내 마음에도 얼룩을 남겼다.


식당에 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태안의 별미 영양굴밥이 먹고 싶은데 아빠는 메뉴판을 보시더니 가장 싼 바지락 칼국수를 먹자고 하신다. 영양굴밥과 바지락 칼국수 가격은 두 배 차이. 어느 곳에서나 먹을 수 있는 바지락 칼국수를 태안까지 와서 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난 “영양굴밥이 먹고 싶어요!”라는 말을 시원하게 내뱉지 못한다. 엄마의 중재로 우리는 영양굴밥을 먹었지만 그 순간에도 아빠가 돈을 아끼시는 모습이 느껴졌다. 아빠는 굴이 비려서 싫었다고 괜히 지나가는 말을 하신다. 그래도 가족들의 의견을 물어봐 주셔야 하는 게 아닌가. 단지 영양굴밥으로 아빠가 날 사랑하시지 않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왜 그 순간까지도 눈치를 봐야 했을까. 눈을 못 마주치고 주저주저하는 순간이 힘들었다. 차라리 내가 밥을 샀으면 그런 고민은 안 했을 텐데.


부모님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알뜰살뜰하게 살아오신 부모님을 존경하고, 성실하게 살아오신 그분들을 따라갈 수 없다. 이번에도 가장 좋은 새우젓과 고춧가루를 선별하여 부드러운 배추를 골라 김장을 담고,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셨다. 배추김치뿐이랴. 깍두기, 갓김치, 총각김치까지 김치 냉장고에 들어갈 틈도 없이 가득가득 채워주셨다. 자신들의 김치보다 자식들을 위한 김장이었다는 것을 안다.


만원을 아꼈을 때 그분들의 검소한 보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날은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과거를 한 단면처럼 마주하는 현실이 슬펐다. 후각은 오감 중에 가장 빨리 무뎌지는 기관이라고 하는데 난 그날 그러지 못했다. 좀처럼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부모님을 벗어나도 코끝에 냄새가 배어 시큰거렸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간 태안의 기억이 아름다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행하게도 노을진 바다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올라왔다. 구름이 자욱했다. 차 안에서 잠깐 스친 서해는 마치 입체 모형처럼 얼어붙어 보였다. 그것은 얼어붙은 내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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