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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 있는 Dec 24. 2020

네버랜드를 꿈꾸며


핸드폰에 처음 저장된 남편의 애칭은 ‘피터팬’이었다. 순간적으로 결정한 그 애칭은 식상하고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왜 그렇게 저장했는지 두고두고 생각해볼 만한 일이었다. 결혼하기 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장의 역할을 해오던 남편이 동심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집에서만이라도 어린아이 같기를. 그런 당신을 사랑할 자신이 있다는 포부가 담겨 있었다. 어른이 되지 않는 아이들만 사는 곳. 네버랜드를 만들고 싶었던 꿈이 있었다.


며칠 전부터 은근히 결혼 10주년에 대한 기대감이 몽실몽실 커져 있었다. 그날을 얼마나 기대하고 고대했는지 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죽을 먹으면서 기운을 차릴 만큼 결혼 10주년을 특별히 보내고 싶은 갈망은 원대해졌다. 하필 코로나로 옴짝달싹 못 하는 시국에 어떻게 하면 기억에 남을 하루를 보낼지 뾰족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산 정상을 오를까도 생각했다. 험난한 산세를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면서 팍팍한 인생살이와 결혼생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좋을 거 같았다. 산꼭대기에서 야호를 외치며 앞으로의 결혼생활을 다짐해볼까 생각했다. 목표는 정상인데 매번 그렇듯이 우리 가족의 체력으로는 중간에 돌아올 게 빤했다. 실패감이 들겠지만 하얗게 불태웠어라며 서로를 다독이는 무모한 도전이 되겠지. 아무리 고급스러운 저녁식사를 해도 퉁치기에는 아까웠다.


남편은 에버랜드를 가자고 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피터팬다운 발상이었다. 에버랜드야말로 네버랜드와 걸맞은 상징적인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에버랜드로 향했다. 날지 못하는 피터팬과 팅커벨, 아이들은 왠지 뛰어야 할 거 같아서 동물원부터 달려갔다. 사파리월드, 로스트밸리에서 수륙양용차를 타고 다니며 흔히 볼 수 없었던 낙타, 백호, 코뿔소, 기린, 하이에나, 홍학 등 다양한 동물을 볼 수 있었다. 동물을 구경할 때마다 일상의 잔상이 떠오르는 건 결혼기념일에 대한 마법 때문이었을까. 삼라만상 세상 이치가 동물에게서 펼쳐지는 거 같았다.


서열을 정하고자 박 터지게 싸우는 원숭이 무리, 새끼 원숭이를 꼭 안고 있는 엄마 원숭이의 모습. 후드득 똥 싸는 알파카, 그런 알파카의 젖을 쫓아다니며 빠는 새끼.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무에 축 늘어진 판다. 야생성을 잃어버리고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백호. 원형 굴레를 돌리면 한 개씩 떨어지는 건빵을 주워 먹는 게 가장 큰 낙(樂)처럼 보이는 곰. 조련사가 채소를 흔들면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와서 풀 뜯어먹는 기린. 사람처럼 언어를 구사해서 유명해진 코끼리 코식이 등.


처음에는 진귀한 동물들을 감탄했다. 시간이 갈수록 한정된 공간에서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동물들이 애잔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훈련하느라 피부가 여기저기 찢긴 바다표범, 물속에서 헤엄치는 바다표범과 물개가 박수를 치고, 계단을 오르고, 노래를 부르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거대한 상업적이고 자본 세계 아래 똑같은 하루를 사는 동물들. 한평생 그곳이 전부라고 믿고 살다 맞이하는 죽음. 최소한의 규격 안에 전시된 동물들이 불쌍했다. 나처럼 즐기기 위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놀이동산인데. 결혼기념일을 자축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인간이 만든 감옥에서 사는 동물원의 생태계를 마냥 기뻐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감정이 들었다.

    

그중에 진짜 사람처럼 느껴졌던 오랑우탄이 있었다. 더없이 쓸쓸한 눈빛으로 다가오던 아이. 잊고 지낸 친구를 만난 거처럼 두꺼운 유리 사이로 우리는 오랫동안 마주 보았다. 손을 마주 대고, 얼굴을 마주했다. 날 꺼내 줘. 숨길 수 없는 표정이 느껴졌다. 오랑우탄의 손을 잡고 구출해주고 싶은 심정이 솟구쳤다. 그래, 네가 사는 정글로 돌아가자. 얼른! 우리는 하늘을 높이 올라 야생이 살아있는 숲 속으로 날아들었다. 노출된 지옥에 마음이 지친 오랑우탄이 터덜터덜 고향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에 손을 힘껏 흔들었다. 오랑우탄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랐지만 유리창에 비치는 오랑우탄은 너무나 가까이 서 있었다. 충격적일 만큼 너무도 불행해 보였다.


오래된 갈증과 공허함. 웃고 떠들며 수없이 지나치는 사람들. 나 역시 아무 도움 없이 떠날 거를 예상했다는 듯이  뒤돌아 앉아 고개를 푹 숙이던 아이. 교감한 순간이 놀라워서, 미안해서 한참을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오랑우탄은 내게 간절하게 속삭였다. 자유를 위해 떠나.




난 그날 충분히 즐거웠다. 놀이기구를 타는 곳에는 마주치는 눈빛이 어색한 웃음을 파는 서비스가 있었다. 추운 날 흘러나오는 음악에 앳된 여자들이 똑같이 춤을 추었다. 태엽 감은 인형처럼. 회전목마처럼 무한 반복되는 그들의 안내멘트. 그들의 들뜬 목소리는 말라갔고 힘겨웠다. 예전에는 꿈과 사랑이 있는 놀이동산에서 환상만 보였는데 이제는 현실이 보인다. 인형의 탈을 써도, 화려한 전구가 반짝거려도 네버랜드를 흉내 내는 불편한 진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동물원에 있는 동물과 무엇이 다른가. 한평생 갇혀 살아가는 생명의 무고한 희생이, 삶을 살아가는 고단함이 느껴졌다.


호텔에서 쓰러져 자다가 빳빳하고 바스락거리는 침구가 불편해 식구들이 깨버렸다. 덕분에 우리는 10년 안에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나누게 되었다. 나의 바람은 분명해졌다. 패러글라이딩. 잠시라도 바람을 느끼며 날아보고 싶어. 피터팬과 팅커벨처럼. 그것은 쇠고랑 같은 속세에 연연하고 싶지 않은 오랑우탄과의 약속 같았다. 혀 있지 않기를. 나이 먹지 않기를. 언제나 꿈꿀 수 있기를.


수다스럽게 행복을 나누던 새벽이 밝아왔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너랑 나랑 다른 게 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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