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01-220931 at 영광 31사단
수평선을 바라보며
격오지의 일과는 일상이라기엔 사뭇 다르다.
사색의 시간이 주어진다.
수첩에 흘린 사색의 흔적을 기록한다.
만연체? 의식의 흐름?
내 군 생활이 이럴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지. 도시 한복판에서 근무를 하게 될 줄도, 격오지에 가서 경계대기를 서게 될 줄도. 열아홉, 과외 쌤이 그랬다. 군대에 가 경계근무를 서며 지나온 날과 앞으로의 날들에 생각하게 될 것이라. 배도 고파보고, 추위에도 떨어보며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 군 생활은 그것과 거리가 멀 줄 알았지. 운전병이 되었고, 후방으로 자대 배치를 받고, 그 자대마저 광역시 내부의 아파트에 둘러싸인 곳이니. 그래서 난 춥고 배고프고 잠오는 군 생활은 없을 줄 알았지. 근데 지금의 난, 몇 차례의 보안 절차를 거쳐야 들어올 수 있는 곳에서, 훈련이 아닌 24시간 실제 작전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일출, 일몰, 말 그대로 해 뜨고, 해 지는 시간에 경계근무를 서는, 바다가 밀려오고 별이 쏟아지는 격오지에서 파견 근무를 서고 있다. 뭐 그렇듯, 예상했듯, 당연히 그러하게도, 그것들을 바라보며 여러가지 생각을 한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이곳에 있는 것이라곤 낭만 밖에 없다는 선임들의 조언을 들으며, 그런데 일몰이 너무 아름다워 다 같이 동의하게 되는)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아—, 그냥, 바다를 보면서 많은 생각들에 잠긴다. 일몰 경계대기는 노을을 바라보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지만은, 일출 경계대기는 새벽에 올라가 별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적잖은 마음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을, 이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파도 소리에 하나, 둘, 셋을 세기도, 이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하던 옛사람들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나의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떠오르기도, 별자리 이야기를 만들어낸 옛적 목동들의 경험을 이어받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가장 많이 하게 되는 생각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결국 하게 되는 것은 본질과의 대화. — 그건 무엇인가? 그것은 별과 별자리를 바라보는 것. 무수히 쏟아지는 것들에 대하여. 그들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 본질을 건져내는 힘….
칡 덩쿨 제거하기
반장님이 칡 덩쿨에 덮인 나무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저렇게 놔두다간 햇빛을 받지 못해 나무가 죽는다고 하셨다. 나무를 뒤덮은 칡 덩쿨을 걷어낸다. 사람 키 보다 높은 나무를 꼭대기까지 정복한 칡을 걷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선임이 말한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얽혀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음… 모르겠다.
그저 내가 하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은,
눈 앞의 덩쿨부터 하나하나씩 걷어내 가는 것.
걷어낸다. 낫으로 쳐낸다. 덩쿨을 잡아당긴다.
다시, 다시, 한 번 더, 또 다시….
어느새 뿌리를 뽑았다.
칡 덩쿨에 덮여있던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는 그럼에도 살기 위해 가지를 삐죽삐죽 뻗어 내었다.
그래, 저렇게라도 살아야지. 어떻게라도 살아가야지.
추석입니다
근무를 서고 생활관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하늘을 우연히 쳐다보았습니다. 달이 무척이나 밝습니다. 휴일이란 없고 빨간날과 주말과 평일이 의미를 잃어버린 곳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밝은 하룻밤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묵묵한 하루를 보내고 오늘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언어, 언어를 하자
대학교 이메일 계정으로 메일이 하나 날아왔다. 대부분 별 의미없는 뉴스레터 였기에 무심코 휴지통으로 보내려던 찰나, 해외라는 단어에 손이 갔다. 요지는 해외개척단 안내 홍보 메일이였다. 라스베가스, 싱가폴, 바르셀로나 등 다양한 도시에서 열리는 행사에 국제 교류 참가 비용을 지원해 준다는 내용이다. 항공비, 호텔, 현지 체류비까지 준단다. 눈에 특히 띈 내용은 특정 언어 가능자 우대 선발.
아하. 말이 통해야 한다. 세상이 인공지능으로 돌아가도 우린 결국 인간으로써 너와 나의 대화가 통해야 하는 곳이다. 말이 통해야 하는구나. 언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언어를 배우자!
별이 4개
마치 흙침대 광고같은 이 문구. 살면서도 보기 힘들 포스타 장군을 군 생활 중 보게 될 확률은. 사단장의 정을 느낀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엔 사령관이다. 사령관이 방문한다면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전투력 측정 대비? 상황 조치 훈련? 아니, 잡초 뽑기와 두발 정리. 모순 같지만 그것이 정답이다. 그리고 일병이 기대하는 것은 포스타가 왔다 가는데 간식 하나쯤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별이 온다. 별 2개는 차 타고 오던데 4개는 헬기 타고 날아서 오더라. 별이 4개쯤 되면 뒤를 따라다니는 부관도 장군인 걸 오늘 알게 되었다. 늘 호통치며 소초장을 압박하던 대대장이 활짝 웃고, 군화끈 한 번 제대로 묶지 않던 간부가 긴장을 한다. 버섯 공장마냥 수 많은 곰팡이가 몰려다닌다.
우리에게 큰 관심이 있진 않았다. 원래 방공은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살아남았다. 이런저런 행사를 마치고 모든 사람들이 모여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어쩌다보니 사령관의 오른쪽에 서게 되었다.
나 포스타 옆에서 사진 찍은 사람이야.
사람들이 너무
이 집단의 사람들은 날이 서 있다. 본인보다 한 달 늦게 왔다면 나이 국적 불문 우위에 서야만 한다. 소위 ‘꿀’이라 불리는 행위들에 있어 칼 같이 측정하며, 그 양이 날짜 순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불편해한다. 무소불위의 권력. 능력제 집단이 아닌 기간제 집단으로서 하루하루의 흘러감이 권력으로 변하는 곳. 기간제 능력을 그들은 오롯이 느끼고 갈망하며 탐욕하고 발휘한다.
난 이에 반대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굳건하게 유지되었던 곳을 바꿀 순 없겠지만. 누군가는 반대하는 행위 그 자체를 아니꼽게 보겠지만. 내가 바라는 기준은 하나다. 인간 대 인간으로써 살아가는 것.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너무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불편하면 자세를 고쳐앉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듯이. 좀 편하게 생각하자. 누군들 그러하지 않겠는가. 누가 실수하지 않겠는가. 그럴 수 있다. 능력, 아니 권력적으로 한 단계 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실수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렇기에, 내가 가장 의식하며 경계하고자 하는 것은. 나 또한 그렇게 되고 있지는 않은가. 까마귀 검다하고 웃었는데 겉 희고 속 검은 백로가 되어있진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고민을 하게 된 순간 난 이미 까마귀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내가 꼰대인가 스스로 의문을 던지는 순간 이미 꼰대가 되어있다는 세상의 웃음소리가 씁쓸하게 공감된다. 아 물론, 이는 확신이 아닌 고민의 과정. 정말 그러한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 기껏해야 스물 둘인데. 이런저런 고민 해봐도 되는 나이 아닌가?
특수지 근무 수당
30000원. 이것이 내 헌신의 가치.
헤이즈가 꿈에 나왔다2
좀 꿀꿀한 하루였어서, 점호 준비 시간에 일부러 텐션을 높였다. 재밌는 말도 하고, 하하 웃기도 하면서. 억지로는 아니지만 반자의적으로. 컵라면 한 그릇 하겠냐는 후임의 제안에 물을 올려놓고, IPTV로 아무 노래나 틀다가 헤이즈 뮤비에 손이 갔다. 이것저것 틀다가, ‘비도 오고 그래서’를 듣고 있었다. 그리곤 컵라면을 먹으려고 뚜껑을 뒤집는 순간, 뚜껑 뒷편에 문구가 적혀있다.
#비도오고그래서
우연히라기엔 모두 다 정해진 듯이.
돌려막기
왜 그런 것 많잖아. 신용카드 돌려막기. 텔레비전에 나오던 통증 돌려막기. 행복은 돌려 막을 수 없나? 빚이던 고통이던 받은만큼 돌려받길 원하는 것 같은데. 행복만큼은 소모품인 것 같단 말야. 걔도 좀 돌려막으면 안될까.
도깨비불
야간 작전을 마치고 내려오는 도중. 반장님이 차를 갑자기 멈추었다. 의아한 우리는 운전석을 쳐다보았고, 반장님은 조수석 앞 유리창을 가리켰다. 빛이다. 움직인다. 맥동 변광성 마냥, 아니 마치 들숨 날숨을 내뿜 듯 불빛이 숨을 쉰다. 반딧불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