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01-221130 at 영광 31사단
시작이 반이다
절반 했으니 이제 시작이다.
50%
눈 깜빡이면 전역이다
친한 후임에게 씻으면서 한 말이다.
대학 동기는 2학년을 마무리하며 3학년을 준비하고 있고, 새내기 때 형 누나 하며 따라다니고 술자리에 불러주던 사람들은 멋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4학년이 되고 복수전공을 하고 졸업반이 되었다. 2022년의 주변 사람들이 이러한데, 나는 2023년에 전역하고 2024년에 복학한다. 새해를 2번이나 더 맞아야 대학으로 돌아가는데 그것도 기껏해야 2학년이다. 그럼 지금 3학년을 준비하고 프로젝트를 하고 복수전공을 하며 졸업반이던 사람들은 얼마나 더 앞서 나가 있을까. 남들을 자기 갈 길을 어느덧 찾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왜 그대로 머물러 있는지.
정말 두려운 것은 내가 다시 사회로 돌아간 순간 다른 사람들은 발전했는데 난 5년 전 혹은 열아홉 학생의 능력 그대로 일 것 같아서다. 잠재력과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했던 그 시기는 진작에 끝났는데, 꽃만 피우고 열매는 맺지 못하는 나무가 되진 않을까. 아니 어쩌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잎만 내뱉는 낙엽 같은 존재 일 수도. 그래서 정직하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두렵다. 입대할 때가 추운 겨울이었다. 벌써 다시 추워지기 시작했는데. 당장 내일이라도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럼 곧 꽃 피고 무더운 여름이 될 텐데, 그럼 나 사회로 돌아가야 하는데. 나 잘할 수 있을까? 잘하고 있는 걸까?
디지털과 아날로그
짧디 짧은 삶이지만 그중 가장 긴 기간 동안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시작은 훈련소에서 지루해서, 볼펜을 잡지 않으면 글씨를 적는 방법을 까먹을까 끄적이던 몇 글자의 주절거림이었다. 그러다 세상에는 블로그 챌린지가 유행했다. 가벼운 일상을 담아내는 사람부터 진중한 고민을 적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휴대폰 사용이 허가된 오늘의 군대는 삭막하다. 개인정비시간이 되면 각자는 서로 건드리지 않는 관계가 된다. 할 말이 있어도 개인정비시간이 끝나고 하자며 미룬다. 생활관의 불은 꺼진다. 각자의 침대에 누워 이어폰을 꽃은 채 8~10개의 휴대폰 불빛만이 빛난다. 그곳에서 도저히 참다못한 나는 다목적실로, 싸지방으로 도망친다. 아무도 없는 다목적실에서 불을 켜고 휴대폰을 하다, 책을 읽다, 스페인어를 중얼거린다. 싸지방으로 향해 몇 가지의 문제를 풀거나 글을 쓴다.
후임들에게 물어보았다. 자대에 오고 나서 한 일주일 간은 밀렸던 연락도 하고, 하지 못했던 SNS 구경도 할 텐데. 그 이후로는 휴대폰으로 대체 무엇을 하는지. 특별한 것은 없었다. 대부분이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주말이 되면 30초짜리 숏츠와 릴스를 넘기기 위해 수백 번의 스크롤만 할 뿐이었다.
글을 쓰는 것은.
일주일의 독서를 사람들은 참지 못한다.
3시간의 영화도 참지 못한다.
1시간의 주말 드라마도 참지 못한다.
40분의 넷플릭스 드라마도 참지 못한다.
20분의 유튜브 영상도 참지 못한다.
1분, 혹은 30초의 짤막한 영상에 사람들은 중독되었다.
사람들은 논리성을 잃어버렸다.
흐려진 논리에 "어쩔티비"라 답하며 그러지 '않는' 자들을 꼰대라며 매도한다.
언젠가 진중하고 긴 글을 써야 할 곳에
누군가를 위해 새벽녘에 손글씨를 적을 때에
어쩔티비 저쩔티비를 넘어서는 문장을 뱉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내가 긴 글을 적는 이유.
아득바득 책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이유.
문장의 힘을 믿는다.
글자의 힘을 믿는다.
명료하고 짧은 그것은
그것에 깊이 있는 의미를 담아낼 수 있을 만큼
어휘, 문장, 글을 익힌 사람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 믿는다.
살려줘
북한이 탄도탄을 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투대기와 근무 투입.
나 좀 푹 자고 싶어요.
죽음
02시 00분. 지금 이 쿵쾅거리는 것이 포상을 거칠게 올라와서 인지, 사람의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병장 아무개는 이렇게 죽었다. 그는, 그들은 지구 반대편 타인이 아니었다. 한 울타리 안에서 같은 밥을 먹고 체력 단련 시간이면 슬금 다가와 서로 다치지 않게 풋살 한 게임하자던 사람들이다. 며칠 전에도 그들과 볼을 찼다는 것이다.
23시 30분. 상황 근무자가 분대장을 깨웠고, 분대장이 나를 깨웠다. 소초에서 해안 수색을 나갔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빨리 운전병 차량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평소라면 '에잇' 한 소리 하며 옷을 입었겠지만, 군말 없이 양말을 신기 시작했다. 교통사고라는데 어떡하나. 환복을 마무리하고 전투복 상의를 입으려는 순간 내가 운전해야 할 군용차 한 대가 급하게 위병소를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반장님이 나갔으니 내려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분대장이 들어오더니 상황이 심각한 것 같다고 한다. 누구는 다리가 끼이고, 누구는 의식 불명이라고 한다. 전투복을 입은 채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는다. 올리가 없다. 그럴 리 없지만, 제발 훈련 상황이길 간절히 바랐다.
뜬 눈으로 몇 시간을 보냈다. 며칠 사이 탄도탄을 쉴 새 없이 발사한 북한 때문에 24시간 작전 투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2교대로 들어가던 것도 겨우 인원 보충이 되어 3교대로 바뀐 참이었다. 잠깐 눈을 붙이지도 못하고 근무 투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투복을 입고 누웠기에 간단히 방한 외피와 군장만 챙겨 상황실로 내려갔다. 상황병 자리에 '실제상황'이라는 머리말에 사건의 타임라인을 적은 종이가 놓여있다. 꽤나 길다. 한 페이지로 끝나지 않는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순간, 의식 불명의 병장 아무개 씨는 망자가 되었다. 포상에 올라가기 위해 상황실을 나가려는 순간 놓인 한 짝의 전투화가 눈에 들어왔다. 전투화 끈이 다 끊어진 채, 옆면은 모두 갈려있는 채 놓인 전투화였다. 포상으로 올라갔다. 내가 조금 더 옷을 빨리 입고 현장으로 움직였다면 일말의 상황이라도 바꿀 수 있었을까? 억측 같은 가능성이지만, 사실상 내가 할 수 있던 것은 없지만.
4시간의 작전이 끝났다. 포상을 나왔다. 동이 텄다. 세상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딤
그럼에도 작전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의 작전은 끝나지 않았다. 술과 바퀴에 젊음이 무참히 깔려버린 저 도로도 다음 주면 다시 경계 근무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어떠한 상황에도 우리의 할 일을 해야 한다. 이것도 무뎌지는 것일까? 무뎌져도 괜찮은 것일까? 계속 사로잡혀 있어야 할까? 그렇다면 그 기간은 언제까지여야 할까. 절취선마냥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무언가를 놓기란 쉽지 않다. 장례는 살아있는 자를 위한 것이라 했는데, 몇 가지의 경험이 쌓이면서 조금 공감하게 된다.
반장님이 우리들을 불러 모았다. 소초 간부들도 다들 초급 간부들이기에 그날 밤, 총기와 탄약을 챙기고 뒷수습을 담당한 것은 소초 간부가 아닌 방공 반장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곤 이것은 당신이 매정하기에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경험해 본 자이기에 해야 하는 것이라 했다. 그것이 경험이고 연륜이라 했다.
군에 20년을 몸 담은 상사와 30년 이상을 몸 담은 말년 원사가 겪은 군대의 사건사고는 얼마나 많을까. 이런 죽음은 호상이라 했다. 지금 우리의 옆에서 밥 같이 먹던 사람이 떠났기에 크게 다가오지만 육군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랬다. 100에 한 둘이 이렇게 예우를 다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며, 나머지 아흔여덟은 그저 개죽음으로 마무리된다 했다.
물론 반장님 이야기의 요지는 죽은 자의 폄하가 아닌 오늘을 살아야 하는 자들을 위한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씁쓸하다.
파견종료 진지철수
첫 번째 진지 생활이 끝나간다. 예정보다 늦게 투입되었고 예정보다 오래 있었고 예정보다 늦게 철수하게 되었다. 아이스크림 사는 것 하나도 문서를 만들어 보고하는 군대에서 정작 이런 것들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우리 부대에는 "일어나기 전까지는 믿지 않는다."라는 말이 떠다닐까. 3개월 간의 파견 생활을 잠깐 돌아본다. 군 생활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이곳의 생활과 아파트에 둘러싸진 주둔지의 생활은 많이 다르니까.
오랜만에 바다를 볼 수 있었고, 많은 별을 보았고, 수평선을 보면서 작전을 할 수 있었다. 몇 개의 별똥별을 보았고, 반딧불이와 고라니와 토끼와 청설모와 너구리 친구들을 만났다. 팔굽혀펴기는 특급이 되었고, 뜀걸음은 합격이 나오게 되었다. 후임에게 태양이 지는 곳이 왜 남쪽으로 이동하는지, 하늘이 왜 파란색인지, 오리온자리와 북두칠성 이야기를 해주었고 과학이 재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출 경계작전에서는 포상에 누워 별을 보며 생각하고 일몰 경계작전에서는 육안 감시 소초에서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사색에 잠기곤 했다. 아마 내일쯤 마지막으로 포상에 올라갈 것 같은데 3개월 뒤에나 볼 수 있으니 눈에 잘 담아두어야겠다. 늘 그렇듯, 다시 오지 못 할 수도 있으니까.
첫 진지 끝.
다음 진지 타고 나면 휴가만 남은 말년이다.
월드컵
야 넌 군대에서 올림픽도 보고 월드컵도 보겠네에서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당직사관의 눈을 피해 몰래 훔쳐보는 그 맛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