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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만 아니면 되니까

이기심에 드리워진 합리성 이야기

by hyyenn

최근 독서 모임 하나에 가입했다.


연구자로서 책을 읽는 것은 어찌 보면 응당 당연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고 싶다!'가 아닌 '책을 읽어야만 한다..'

즉, 독서가 나에게 있어 '업(業)'이 된 순간, 그것과 초반에 마주했던 나의 기쁨은 어느샌가 짙은 우울감으로 변질되고 말았다.(물론 이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내면의 박수를!)

글을 읽는 것이 업이다 보니, 굳이 시간을 내서 독서하는 것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오랜 스트레스로 책 읽는 것을 기피하던 어느 날, 나를 독서의 세계로 이끈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문득 책장에서 발견한 뒤 다시금 내가 좋아했던 독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을 때가 되었구나.


내가 가입한 독서 모임은 국제정치에 대한 책들을 읽은 뒤 독후감을 쓰고,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토론을 하게 되어 있다. 이번 1월 책은 '제3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되었다(by. Emmanuel Todd)'인데, 이번 글에서는 해당 책을 읽고, 느낀 점들을 한 번 풀어보고자 한다.




이 책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다각도에서 살펴봄으로써 전쟁의 원인, 전쟁의 현 상황 그리고 예측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을 제시하고 있다. 책의 저자를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러시아만의 특성이라고 해야 할까?(예를 들어 가족 구조의 이해를 통한 국가의 이해) 또는 뉴스에서 접하지 못했던(나 스스로가 러시아를 나쁘게 보는 의도적 편향성이 충분히 의심되기는 한다) 정보들을 접하게 된 것,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양상을 ‘권위주의 vs 민주주의’의 구도를 발전시켜 ‘자유주의적 과두제 진영’과 ‘권위적 민주주의 진영’의 구도로 분석한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시작과 현재진행형, 그리고 예상되는 미래를 서술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전쟁은 어쩌면 더 큰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사례에 지날 수 있다. 그 큰 주제는 어쩌면 이기심이라는 그늘에 드리워진 합리성에 대한 얘기가 아닐까. 즉, 저자의 관점과는 다르게 국가는 필연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고, 그와 같은 결정들이 결국은 합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소련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푸틴의 열망, 도덕적인 잣대로 러시아를 비난하면서도 러시아와의 경제 관계를 놓지 못하는 유럽, 전쟁 초기 막대한 지원을 약속했지만 결국 예산 고갈로 인해 지원을 중단한다는 발표를 한 미국.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해 어떤 지원이든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 코가 석자이다.


이들 국가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나토의 동진에 위협을 느낀 푸틴이 자국을 지키겠다는데, 유가 급등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유럽이 러시아 제재를 일부 완화하겠다는데, 국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시급하고 지원에 필요한 예산이 없어서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잠깐 눈길을 돌리겠다는데 이들 중 과연 누구를 비난할 수 있냐는 것이다.


물론 도덕적인 잣대를 엄격하게 적용하면 그 누구도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합리성의 잣대로 그들을 평가하면? 평가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까? 우리가 흔히 '합리적이다'라고 하는 것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을 때의 일이다. 다시 말해 최소의 비용으로 내가 목적한 바를 이루면 그때 비로소야 합리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욕이 엄청난 푸틴은 2012년부터 계속해서 러시아의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는 인물이다(물론 2012년 이전에도 경력이 있다). 그는 정권유지에 대한 욕심으로 헌법을 개정하기까지 하면서 올해 또다시 대선에 출마하게 되는데, 이런 그에게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자신의 욕심을 정당화하기 위한 '지지율'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푸틴의 지지율은 70% 중후반에서 80% 초반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2014년과 2022년 각각 푸틴의 지지율이 60% 대로 떨어졌던 시기가 있었다. 지지율 하락에도 불구하고 푸틴은 다시 보란 듯이 80% 대로 지지율을 회복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지지율이 회복하기 시작한 시점이 각각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라는 것이다.


정치학에서 지도자와 지지율의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 중 'Rally 'round the flag effect(결집효과)'가 있다. 이는 전쟁과 같은 국제적인 위기가 발생할 경우 국내 지도자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외부로부터 안보 위기가 발생하면 정부 지도자를 중심으로 온 국민이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기 시 지도자 중심 단결효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를 푸틴에 적용하면 전쟁이라는 이기적인 선택은 결국 자신의 지지율을 회복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합리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은 어떠한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를 두고 강력한 비난과 함께, 최근에는 12차 제재를 강행한 바 있다. 하지만 러시아 제재를 방해하는 요인이 있었으니, 바로 지구온난화이다. '사상 유례없는 폭염', '역대급 폭설'은 유럽에서 여름과 겨울에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뉴스 기사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발생하는 이상 기후는 사람들의 에너지 소비량을 증가시키는데, 문제는 유럽이 에너지 분야에서 러시아에게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유럽에서는 대 러시아 제재로 인해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고 동시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었다.


에너지 가격의 상승은 유럽 내 곳곳에서 반정부 투쟁을 발생시켰고, 곧 정부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한 국가의 지도자라면 응당 국제적인 문제와 국내적인 문제 모두에 힘을 써야겠지만, 그들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국내의 유권자이다. 아무리 도덕적인 잣대로 대 러시아 제재를 시행하거나 그를 비난하여도 국내적인 비판에 맞닥뜨리게 되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방안은 더 이상 합리적인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수 차례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전쟁 이전보다 늘어난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량이 이를 방증한다.


미국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발생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골칫거리가 하나 더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끝나면 다행인데, 올해 11월에는 차기 미국의 지도자를 가리는 대선이 예정되어 있다. 국내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우크라이나 문제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대선이 약 10개월 정도 남은 상황에서 중요한 건 민심이지, 지정학적으로 저 멀리 떨어진 국가가 아니다.


다시 처음 문제의식으로 돌아와서, 이기적이라고 생각되는 국가들의 행동은 어쩌면 이기심이라는 그늘에 가리워진 합리성에 기반한 선택일 수도 있다. 내 일이 아니니까, 내 이익이 아니니까 소홀히 하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국제정치학의 아버지 Hans Morgenthau(한스 모겐소)가 얘기하듯이 국가의 목표는 '생존'이다. 생존을 위한 각 국가의 이기적 행동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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