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계발서의 고전하면 많은 이가 스캇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꼽는다. The Road Less Traveled란 멋진 제목의 이 책에는 오랜 세월 내담자와 상담하며 발견한 사랑과 성장의 비밀이 담겨있다.
세상에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생 지침서로 사랑받고 있다. 나 역시 '훈련을 통한 성장'의 과정으로 사랑을 바라본 그의 관점에 동의한다.
ᅠ한편, 스캇 펙의 교훈적인 관점과 대척점에 있는 사랑 이야기가 있으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라는 묘비명으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다.
동물적 자유함을 표방하는 조르바식 사랑과, 훈육을 통한 성장을 강조하는 스캇펙의 사랑은, 서로 다른 심도를 가진 렌즈가 보여주는 이미지만큼이나 대조적이다.
사랑마저 본능이나 감정보다는 전두엽이 내미는 계산서에 무릎을 꿇고 마는 나로서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격정을 못 이겨 허리띠부터 풀고 보는 조르바의 사랑이 내심 부럽다.
연애마저 연정보다 겨울 밤거리의 수은등처럼 차가운 이성이 상석을 차지하는 경향성이 내 안에 자리 잡게 된 배경을 더듬어 가본다.
폭설을 동반한 폭풍이 저택을 휘감는 겨울밤. 한 남자가 바위처럼 흔들의자에 박혀 있다. 그러더니 뭔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밖으로 나선다. 토요일 밤, 괘종시계가 10시 반을 알리면 시작했던 주말의 명화 속 장면이다.
극장 간판 구경하는 게 자유의 여신상 촬영만큼이나 큰일이던 유년 시절, 우리 가족은 그 시각만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텔레비전 앞에 모였다. 그리고는 한 이불에 몸을 섞은 채 브라운관으로 빠져들었다.
비장한 호른 소리가 안방에 울려 퍼지면서 우리의 기대감도 함께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그 순간 나를 좌절하게 만든 것이 있으니, 끝도 없이 펼쳐지는 협찬 광고 목록이다.
뜻도 모를 '화란 나르당의 칠성사이다'를 필두로 '삼성 이코노 텔레비죤' 등이 줄을 이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 그 장면들은 퇴색해 갔지만, 어느 토요일 밤에 보았던 애절하고도 음울한 사랑 이야기는 기억 속 어딘가에 흔적을 남겼다.
딸깍거리며 정수리에 허연 길을 내던 바리깡(이발기)의 서늘한 감촉과 함께 나의 중학생 시절은 시작되었다. 이층 서재에서 나른한 봄의 정취를 즐기던 나는 책장 속에서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어디쯤에서였을까… 불현듯 전의식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영화 속 장면이 글자들 사이로 자욱이 올라왔다. 순간 머릿속이 환해졌다. 그렇다! 내 기억 속 러브스토리는 바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었던 것이다.
첫사랑과 설익은 선택이 낳은 이별과 때늦은 후회, 처절한 복수와 죽음까지도 불사한 사랑. 19세기 중엽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펼쳐진 이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는 그날로 나의 로망이자 순탄치 못할 연애사의 예고편이 되고 만다. 비극적일수록, 비현실적일수록, 극단적일수록 끌리는.
사자와 맞붙어도 등 뒤에 올라타기만 하면 승기를 잡을 수도 있다며 억지를 쓰던 시절. 나는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사춘기로 접어들었다. 티브이 외화나 선데이 서울, 건강 다이제스트 말고는 잡초처럼 비집고 올라오는 호기심을 달래 줄 것이 없던 시절, 나는 학기 초만 되면 운동장 미루나무 근처를 초조하게 서성이던 할부 장사 아저씨 수완에 넘어가 큰일을 저지르고 만다.
부모님 허락도 없이 ‘삼중당 문고’의 한국단편문학전집 할부계약서에 싸인을 하고 만 것이다. <봄봄> <감자> <갯마을> <벙어리 삼룡이>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등 그 면면도 화려했다. 책이 배달되던 날, 어머니는 허락도 없이 이런 걸 들였다고 혼찌검을 내셨으나, 자원해서 문학 소년이 되겠다는 아들을 더 이상 나무라지 않으셨다.
엇나간 독서 동기를 눈치 못 챈 어머니는 밤마다 고생한다며 과일주스를 들이셨고, 가물에 콩 나듯 "누군가의 억센 손이 내 허리를 휘감고 들어왔다" 같은 토속 애로 장면이 등장할 때마다 호흡은 가빠졌다. 어지간한 장면은 다 외울 지경에 이르자 책 읽기도 시들해졌다. 내 몸은 좀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단편소설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신문물을 접하게 된다. 책장 맨 윗 단에서 버킹검 궁전 근위병 마냥 한 치 오차 없이 늘어선 <가정 대백과사전>을 만난 것이다. 자주색 양장에 금박으로 새겨진 제목은 나를 신세계로 이끌어줄 거란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금단의 열매에 눈길이라도 준 듯 이유 없이 올라오는 죄책감은 덤이었다.
‘혹시나?’는 서서히 ‘역시나!’로 바뀌어갔다. 특히 <가정/부부/육아 편>이 고급 지식의 보고였다. 부모님 외출이 반가워지기 시작했고, 숨죽여 탐독하다가 신지식이라도 만날 때면, 다음 날 교실 뒤에서 열릴 세미나에 대한 기대감과 학문의 즐거움에 감사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나는 실전보다는 불온해 보이는 서적들을 탐색해 가며 사랑에 대한 환상을 키워갔다.
그러던 ᅠ어느 날이었다. 비밀 서고에서 지식 사냥을 하고 있던 나는 그동안 만나 ‘사랑’과는 느낌이 사뭇 다른 '사랑'을 만나게 된다. <문화/교양> 편으로 기억한다. 백과사전 후반부 어느 챕터에선가 '세계 종교와 철학'이란 주제가 등장했다. 칸트, 니체, 헤겔 등 기라성 같은 철학자의 초상이 나를 노려봤다.
이어서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사랑'이고 불교는 '자비'”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그간 가슴에 품고 탐닉했던 사랑과는 느껴지는 게 달랐다. 훗날 그 의미를 두고 긴 씨름을 하게 될 아가페 사랑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생경하면서도 의미심장했지만, 더 들어가기에 내 나이는 어렸고 관심사에서 밀렸다.
온 가족이 선망하던 미션스쿨 입학이라는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버지 동업자의 벼락같은 대문 킥과 함께 파산 소식이 날아들었다. 느닷없이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터널로 진입한 것이다.
가정환경조사 때마다 냉장고, 티브이, 전축 등 모든 항목에 손을 들어 뒤통수가 따갑던 시절은 가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어린 나의 눈에는 그 사태의 원인도 해결책도 그리고 끝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절망적인 현실을 따돌리는 길은 2층 서재 바닥에 드러누워 책을 읽는 것뿐. 책 읽기는 현실의 고통을 공상의 나래로 잠시 덮어두는 의식 같은 행위였다.
그날도 나는 습기 차 끈적이는 장판 위에 누워 김동길 교수 에세이를 읽고 있었다. 그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시 한 편을 만나게 된다.
"사랑이란 완전을 기하는 마음으로 결함을 연민하는 향기입니다"로 기억한다.
뒤통수를 가격 당한 느낌이었고, 드디어 큰 깨달음에 들어섰음을 직감했다. 어느 무명 시인의 촌철살인에 질투심도 올라왔다. 어쩌면 그때 충격과 감동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선택했다면 아무리 싫더라도 연민으로 무한 책임을 지는 것, 그게 사랑이지! 그때 나는 사랑을 '선택에 대한 무한 책임'으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이후로 누군가 사랑을 물어오거든 오글거리는 목소리로 그 시를 읊어댔다.
'절대적이고 극단적인 사랑'이라고 하는 대지에 '선택에 대한 무한 책임'이라고 하는 난해한 설계도까지 들었으니 사랑의 난공사는 예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관계라는 벽돌을 쌓아가는 과정도 즐거운 놀이보다는 책임감이 동반된 의식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난해하고도 지난한 사랑 공사에 지쳐갈 무렵, 사랑은 그저 인생의 전부라는 생각이 든 건, 2000년대 초 수서역 근처 쟁골마을에서 절친과 동거할 무렵이었다. 그야말로 순간적인 현현(懸懸)이었다. 그때 나는 한 권의 책(아직도 가야 할 길)을 통해 멘토(스캇 펙)를 만나서 풀리지 않던 사랑의 도식을 점검해 갔다.
불쾌한 맛을 못 견디는 아이의 혀처럼 오로지 단 맛 만을 고집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미세한 이질감조차 감내하지 못해 삶을 더 건강하게 해 줄 진정한 맛을 놓쳐버린 건 아닐까. 어쩌면 허구를 기반으로 한 환상과 도덕적 강박이 묘하게 혼합된 배지에서 자라난 '이상화(理想化)'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고통도 없고 기쁨과 평화만 깃든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끊임없이 나를 유혹해 왔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죽음의 강을 거너지 않고는 들어설 수 없는 잃어버린 낙원과도 같은 곳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상화의 덫으로부터의 구원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절망스러웠다.
한편, 지향해야 할 사랑의 정의는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순간 나를 사로잡는 느낌이나 감정은 사랑의 재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닌 성장하려는 의지와 훈련이 동반된 지난한 과정, 동사이다.
상대와 나의 정신적 성장을 위해 내 자아를 조금씩 확장해 나가는 과정,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시도를 방해하는 것은 게으름과 무지 그리고 두려움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랑에 의지와 용기가 필요한 이유다.
활자 위에서 세워져 종이 냄새 풍기는 사랑의 관념은 겉보기엔 그럴 듯 하지만, 그 누구의 삶도 담을 수 없는 벌판 위 모델하우스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때라도 속히, 머리에서 필드로 훈련장을 이동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