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화하는 관계, 다르게 맞이할 용기
어쩌면 관계는 날씨를 닮았다.
따뜻했던 햇살도 해가 기울면 그늘이 되고, 시원했던 그늘은 계절이 바뀌며 쓸쓸함으로 다가온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반가움으로 다가왔던 존재가 어느 순간 답답함이나 거리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관계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그저 뜻밖의 변화에 대한 준비가 없었을 뿐이다.
가을은 관계의 진폭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계절이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관계의 맥락을 인정하고, 그 흐름에 맞춰 관계의 구조를 조정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은 결국 변화에 적응하려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세월 앞에 드러나는 관계의 진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시간의 위력을 단번에 보여주는 말이다. 그 앞에서 예외는 없다. 영원할 것 같던 관계도 시간의 틀 속에서 모양이 바뀌고, 결국엔 민낯을 드러낸다. 이는 인간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 조직, 공동체 등 사람이 얽힌 모든 관계가 그렇다.
어느 마을에서 원로들이 후세를 위해 마을 입구에 표지석을 세웠다. 어른 키를 훌쩍 넘는 크기로, 마을 이름을 큼직하게 새긴 이 표지석은 한때 주민들의 자부심이자 상징이었다. 하지만 마을이 커지고 외부인이 늘면서, 표지석은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시야를 가리고, 사람들이 모여 흡연하거나 소란을 피운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애물단지가 된 표지석은 철거 수순을 밟고 있다.
군사시설 주변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한 육군훈련소 인근 주민들은 탄피가 날아들고 먼지가 인다는 이유로 불편을 호소한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곳이 삶의 터전이었다. 모든 게 귀하던 시절, 주민들은 떨어진 탄피를 주워 생계를 이어갔고, 부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하며 잠들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을이 확장되고 이주민이 늘어나자, 훈련소는 기피 시설로 전락했다. 모 지역, 공군 전투비행단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국가를 지키는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어느 지역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처럼 관계와 구조는 시간이 흐르며 필연적으로 변화한다. 그 변화는 갈등을 동반하고, 고통은 때로는 서서히, 때로는 불쑥 찾아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받아들이기 더 힘들다.
변화를 마주하는 용기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미래에서 찾아온다는 데 있다. 처음엔 따뜻한 감정과 의미 있는 교류로 모든 것이 좋아 보인다. 그 시절, 관계는 영원할 것만 같다. 하지만 관계도 생명체처럼 물리적·심리적 변화를 겪으며 부침을 맞는다. 사람도, 환경도, 삶의 맥락도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법정에서 마주하는 싸늘한 시선과 긴장된 몸짓들. 한때는 서로를 선택할 만큼 가까웠던 이들이, 이제는 변화에 무너진 관계 속에서 차갑게 대면하고 있다.
선조들은 이 삶의 위기를 제도로 보완하고자 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결혼이라는 약속, 조직이라는 틀은 모두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하지만 제도가 정답만은 아니다. 변화한 환경 속에서 제도가 오히려 관계를 고착시키고, 답답함을 키우며, 멀어지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바로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관계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 단순하고도 엄중한 진실을 인정하고, 관계 역시 그 흐름에 맞춰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 기대, 불만, 익숙함 속에서 생겨나는 피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찰이 필요하다.
기피 시설이 되지 않으려면
지혜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다. 자연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듯, 세월의 흐름도 막을 수 없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변화 자체는 피할 수 없지만, 그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고, 서로의 마음을 살피며, 그에 맞춰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고 조정할 줄 아는 능력. 그것이 바로 관계의 본질이며,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모든 관계는 변한다. 과거의 정이나 익숙함에만 의존하기보다, 달라진 관계를 다르게 맞이할 수 있는 준비된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끔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일이다.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기피 시설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