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마무리되거나 매듭지어질 때 우리는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이미 지나가 버려 되돌릴 수 없을 때 아쉬움은 커진다. 그래서일까. 한 해가 저무는 세밑에는 알고 지내는 사람끼리 안부를 전한다. 좀 더 잘할 걸 하는 마음에서 일거다. 그런데 마음을 전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아쉬움은 짙어져 회한이 된다.
지난가을, 어쩌면 마음의 짐을 무덤까지 가져갔을지 모를 근심거리 하나가 풀렸다. 시끌벅적한 회식 자리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이, 돌아갈 때마다 마음에 그늘을 드리우곤 했던 시름을 덜어준 것이다.
낯익은 목소리인데 누군지 선뜻 떠오르질 않는다. 머리가 머뭇대는 동안 가슴이 먼저 반응한다. 차분한 말투로 누군지 밝힌 순간 나는 말을 잇지 못한다. 돌아갈 때마다 미안했고 이제는 삶의 이력 한 구석에서 박제되어가던 서툰 시절의 이야기.
적당한 호칭 찾느라 망설였고, 당시 호칭이 편하다는데 서로 동의한다. 뜻밖에도 일본 문학을 연구하고 있다며 근황을 전한다. 그 말에 반가워 최근에 읽은 일본 소설로 화답한다.
이것저것 두루 아시는 건 여전하시네요...
라는 덕담 아닌 덕담이 돌아온다. 연구주제인 그 소설을 내 꼭 읽겠노라는 약속과 함께 전화 주어 고맙다는 인사로 대화는 마무리된다.
예기치 않았던 전화 한 통에 삶의 무게 한 움큼이 덜어졌고, 종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정원 한쪽에서 시들어 가던 나무에 새순이 돋았다.
우리 안에는 관계가 자라는 정원이 있다.
나는 그걸 관계의 정원이라 부른다. 정원을 보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한다. 조금만 더 일찍 그걸 보는 눈을 가졌더라면... 한 그루 관계의 가치를 그때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내 삶은 좀 더 가벼울 것이고 생은 보다 충만할 것이다.
하나 정원사의 서툰 손길은 나무에 상처를 주기 일쑤였고, 좁은 속 들킬세라 홀연히 떠나곤 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대지로부터 올라오는 기운과 햇빛, 비바람을 견딘 뒤 그윽한 곡선을 그리는 나이테를 얻을 수도 있었으리라. 해가 짧아지고 생각이 깊어지는 날이 오면 잎 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열매를 만날 수도 있었을 테고.
기억에서는 사라지고 없지만 이른 시절 경험한 관계의 가지와 이파리가 쌓이고 분해되어 내 관계 정원의 토양이 되었다.
그 시절 관계는 어째서 생명을 고양하는 놀이보다는 참회와 성찰로 점철된 의식과도 같았을까. 시시각각 흐르고 번지는 감정에 놀라 누르고 경계만 했던 탓일까. 아니면 온전히 나로 존재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주저하며 무언가에 이끌리기만 했던 탓일까.
욕망의 바다를 자유로이 누비며 생의 근육을 단련하기보다는 온기 없는 관념의 세계에서 가치체계 질서만을 추구했던 내 스토아풍 정원이 탄생하게 된 시절로 들어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