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구조의 힘

관계는 어떻게 우리를 움직이는가

by 장동혁

* 1953년 프랑스


"어째서 당신은 나보다 로제를 더 좋아하는 거지? 그 무심한 사내의 무엇이 내가 당신에게 매일 바치는 이 열렬한 사랑보다 낫다는 거지?” 같은 언젠가 시몽이 그녀에게 던질 질문들, 고통당하는 입장에서 응당 제기할 만한 질문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아시나요> -


한걸음씩 거리를 좁혀가며 다가오는 남자와 짧지 않은 세월 추억을 함께 쌓아온 사람 사이 어딘가에서 헤메고 있는 여인의 마음속 풍경이다.


놓아주지도 그렇다고 확신을 주지도 않는 사람을 이제는 정리해야 한다는 걸 그녀도 잘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그 상황을 썸남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괴롭기만 하다.


L= B-S-D라는 말이 있다. 태어나서(Birth) 죽을 때까지(Death) 인간은 괴로움(suffering)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지나친 염세 같아도 괴로움은 인간의 전유물이(專有物)이다. 다른 동물들도 고통은 경험하지만 괴로움을 겪지는 않는다.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통제하려 들 때 괴로움이 된다.

그 덕에 우리는 언제 닥칠지 모를 괴로움에 대비하느라 소중한 인생을 써버린다. 나이 들어간다는 건 괴로움 목록 추가에 다름 아니다. 그 종류도 다양하다. 돈 때문에 괴롭고, 건강이 염려되고, 사람 때문에 지친다.


기아나 질병처럼 과학기술로 해결해온 괴로움이 있는가 하면 인류만큼 오래됐지만 해결책 찾기가 요원한 괴로움도 있다. 관계로 인한 괴로움, 갈등이다. 살다 보면 예외 없이 만나게 되는 갈등은 프랑스 유치원에서 한국의 노인정까지 남녀노소,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중에는 에스프레소 더블샷처럼 너무 쓰지만 다시 찾게 되는 오묘한 맛을 가진 괴로움이 있다. 남녀 관계에서 오는 괴로움이다.





사랑에 빠졌어요. 너무 아파요. 하지만 낫고 싶지 않아요.
-영화 일 포스티노-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영화 ‘일 포스티노’에 등장하는 대사다.


주점 여급과 사랑에 빠진 섬 마을 우편배달부가 사랑의 고통을 호소하는 장면이다. 아프지만 낫고 싶지 않은 병, 한 번쯤은 앓아보았을 거다. 서로 좋아서 만났지만 어김없이 시련은 찾아온다.


그 인간 때문에 죽을 것 같다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해 괴로워 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그 문제를 공식으로 보자면 초등학생이 풀 정도로 간단하다. 안 만나면 된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거다. 하지만 그게 아님을 세상 좀 살다 보면 안다.

그건 풀어서 0으로 만들 수 있는 문제(problem)가 아니라, 관계와 감정의 함수인 갈등(conflict) 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갈등을 단번에 없앨 수는 없다. 긴 과정을 거치며 해소될 뿐.


그렇다면 죽을 것 같으면서도 관계를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정’때문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애증’ 때문이라고도 한다.


갈등 이론에서는 '구조의 힘’으로 설명한다.

한마디로 우리를 가두어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틀(structure)이 있다는 거다.

그 틀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 어지간해서는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무시무시한 구조는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소개팅에 나온 남녀가 차를 마신다. 남자가 밤 새 검색해 고른 카페가 여자는 맘에 든다. 이곳저곳을 사진에 담는다. 여자가 좋아하는 인스타 감성이다.

남자가 메뉴를 묻자 여자는 카페라떼라고 대답한다. 찻집을 나와 조금 걷자 아담한 공원이 나온다. 벤치 위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오월의 햇살이 남녀를 위해 자리를 슬며시 비켜준다.


남자와 여자의 소개팅에는 수많은 액션(action)과 리액션(reaction)이 있었다. 이걸 상호작용(interaction)이라고 한다. 상호작용들이 쌓여 관계(relationship)가 된다. 하지만 이 정도로 관계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 서로 호감을 느껴 몇 차례 더 만나 상호작용이 쌓여야 진짜 관계가 된다.


관계는 참 유용하다.

매운 게 당길 때 함께 먹어줄 사람이 생겼다. 맛집 검색도 해주고 심지어 데려다 주기까지 한다. 아플 땐 옆에 있어주기도 한다. 자주 만나다 보니 편하다. 둘만 아는 닉네임도 있다. 관계 초기 서로의 기대가 대부분 채워지는 시기다. 녹색 상호작용(green interaction) 일색이다. 둘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빨간색 상호작용(red interaction)이 시작된다. 큰일 보다는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괜한 일로 트집을 잡는가 하면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한다. 매운 거 먹고싶다고 하니 얼마전에 갔는데 또 가냐며 신경질을 부린다. 그토록 매력적이던 미소도 보기 싫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싶다. 기대와 설렘은 사라진 지 오래다.

갈등이다.

다툼이 지속되다보니 지친다. 옛날 인디언 처녀가 그랬듯 어딘가에서 더 탐스럽고 맛있는 옥수수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불행히도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만남을 기대할 수도 없다. 이때쯤 스멀스멀 올라오는 생각이 있다.


끝낼까...?


그러다가도 나도 모르게 퇴근하며 문자를 보낸다. "나 퇴근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주말 약속까지 잡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뭔가에 끌려가는 느낌이다.


구조다.

나도 모르는 사이 구조가 생긴 것이다. 무심코 문자를 보내고 있고, 답을 기다리고 있다. 먼저 만나자고 해야 상대는 겨우 움직인다. 그리고 늘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다.


관계가 반복되고 오래 지속되다 보면 구조가 된다.

처음엔 사람이 움직이지만 나중에는 구조가 사람을 움직인다.


구조는 요즘 말로 꿀을 빠는 시기보다는 권태에 빠지거나 갈등이 생겼을 때 만져진다. 그때쯤이면 빠져나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구조를 깨거나 바꿔야 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구조 안에는 감정이란 접착제로 덧대진 수많은 상호작용들이 켜켜이 싸여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주변으로부터 공인까지 받게 되면 구조는 더욱 강해진다. 구조 자체 힘에다 외부 지지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건물에 등기가 쳐지는 순간, 때려 부수기 전까지는 과세 대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노래가 있다.


이렇게도 사랑이 괴로울 줄 알았다면 차라리 당신만을 만나지나 말 것을…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소용없는 일 맞다. 아차! 싶을 때는 이미 늦은 거다.

이런 구조의 힘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있다.


전후 유럽 문단의 매혹적인 작은 악마,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이다.


주인공 폴은 오랜 기간 연인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확신을 주지 못하는 로제와 풋풋한 매력을 가진 연하남 시몽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애매한 관계를 끝내고 한 발 더 나가기 위해서는 뭔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걸 둘 다 알지만 누구도 입을 떼지 못한다. 그런 폴을 지켜보는 시몽은 안타깝기만 하다.


섬세한 배려로 자신이 여전히 여자임을 느끼게 해주는 시몽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적힌 시몽의 편지에 그녀는 설렜고, 마음의 빗장이 열린다.


그렇게 시몽과 새로운 연인관계를 이어가던 폴에게 어느 날 속달우편 한통이 날아온다.


당신을 만나야겠어, 더는 이렇게 지낼 수 없어. 전화해 줘! - 로제가


이어서 둔중한 몸집의 로제가 등장하고, 한 걸음 다가와 그녀 어깨 위에 두 손을 얹는다. 그리고는 말한다.

난 너무 불행했어


폴이 화답한다.


나도 그랬어

이 가벼운 터치 하나가 그들을 어딘가론가 데려간다. 둘만의 익숙한 구조로. 이어지는 스토리는 수많은 드라마나 유행가에 등장하는 대로다. 늘 기다리게 하고 울게 만드는 나쁜 남자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다시 시작한 폴과 로제의 관계 구조는 어떻게 됐을까. 리모델링이 일어났을까.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안타깝게도 구조에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임을 암시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시몽을 떠나보낸 날, 폴은 일 때문에 저녁을 함께하기 어렵다는 로제의 전화를 받는다. 그녀는 또다시 언제 올지 모르는 남자를 기다리며 우울해할 것이다.


이처럼 자기 욕구만 채우고 일을 핑계로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는 남자를 뿌리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구조의 힘이다.


주위 사람들 눈에는 그보다 더한 바보짓이 없다. 그래서 한 마디씩 던진다.


너 미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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