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시베리아, 러시아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학자가 미래를 예언한다.
미래로부터 밀려드는 변화의 속도에 인간이 큰 충격에 빠지게 될 거라고.
그가 예언한 미래가 바로 오늘이다. 미래 충격(future shock)이라고 부르며 그가 예언한 것 중 상당 부분이 사실이 되어버렸다. 서고를 옮겨 다니며 정보를 얻던 시대의 예측치고는 놀랍다.
하나 그의 예상을 뛰어넘은 것들도 있으니 디지털 기기의 등장이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당시 컴퓨터의 수백, 수천 배 성능을 가진 기기가 손바닥 안으로 들어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공부해야 할 것은 많은 데다가 거듭되는 시험에 시달리는 학생들, 그리고 소란을 피우는 어린이와 요란한 전화소리, 망가진 세탁기, 10대 아이들 방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로큰롤 음악 소리, 응접실의 TV 소리에 시달려야만 하는 주부 등-이런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감각에 밀어닥치는 정보의 파도 때문에 자신의 사고능력과 행동능력이 손상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 분명하다.
- <미래 충격> 엘빈 토플러 -
정보 자극의 홍수를 우려하며 그가 그린 미래다.
‘전(前) 정보화시대인’이었던 토플러는 백색가전이나 음향기기의 소음만으로도 우리 정신이 압도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위 글을 읽으며 정신적 압박보다는 아련한 향수가 올라오는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우리 혼을 쏙 빼놓고야 마는 디지털 기기의 활약상이 보이지 않아서 일거다.
요즘 부모들은 오히려 생활소음으로 부산하던 시절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그의 예측과 달리 오늘날 가족은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만의 방식으로 정보 자극의 세례를 받느라 적막강산인 경우가 많다.
그가 우려한 또 한 가지가 인간관계다.
미래에는 인간관계가 훨씬 짧은 주기로 반복될 것이고, 피상적인 관계가 주를 이룰 것으로 보았다. 옆집 아들 성적부터 빚이 얼마인지 까지 서로 알던 관계에서 세탁물만 주고받으면 끝나버리는 관계가 주를 이룰 거라 본 것이다. 그렇게 기능 위주의 관계만 지속하다 보면 정신적·심리적 문제에 부딪칠 거란 이야기다.
이 또한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손바닥만 한 기기 안에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이 그물처럼 얽혀있다. 사회관계망은 우리를 24시간 감시하며 잠시의 쉼도 용납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를 늘 각성상태로 만드는 '정보 자극'과 '인간관계'로부터 단절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보와 관계 해독으로 건강한 정신을 되찾게 될까. 아니면 엄습해오는 고독과 무료함으로 정신적 문제가 발생할까.
정보 홍수와 소비사회에 염증을 느낀 프랑스의 한 남자가 호기롭게도 그 실험에 들어간다. 문명을 등진 채 시베리아 숲으로 들어간 것이다.
'나는 자연인이다'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정착한 곳은 전기가 들어오고 가끔씩 와이파이도 터지는 숲 속 마을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마을도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오지 중 오지다. 누군가와 술 한 잔 하려 해도 종로에서 천안까지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교통수단이라고는 두 발과 스케이트가 전부다.
그렇게 원시 자연으로 돌아간 그는 6개월간 은둔자로 살아가며 아날로그적 일상을 기록한다.
쉴 새 없이 해석해달라고 보채는 정보와 진정한 나로 존재할 틈을 주지 않는 관계의 그물에서 빠져나와 그가 정착한 곳은 죽음과 생명의 기운이 조화롭게 순환하는 원시 자연이다. 통나무 벽을 사이로 밖은 몇 분이면 손끝부터 시작해 온몸을 얼려 바스러지게 할 혹한의 세계다.
죽음의 손짓에 응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시도 자연의 섭리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생명체로써 기본적으로 반응하는데 필요한 에너지 고갈을 막기 위해, 장작 패기로부터 시작하는 육체노동은 일과가 되어버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추위와 정적 그리고 고독은 관계나 정보의 금단현상을 느낄 틈조차 주지 않았다.
숲 속 오두막에서의 하루는 호수의 절경을 담은 창을 통해 들어온다. 그렇게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순백의 하루가 그를 기다린다. 조물주의 계관시인 자연이 펼쳐내는 풍부한 뉘앙스에 오감은 자연스레 감응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진보나 개선 같은 인간 특유의 불손한 욕구마저 사라진다. 대자연 앞에서는 그저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게 최고의 미덕임도 깨닫는다. 이로써 그는 좀비처럼 달려드는 정보와 기대라는 청구서를 불시에 내미는 인간관계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된다.
은둔생활 초기, 자연의 신비에 한창 매료되던 때만 해도 문명의 옷을 너무 쉽게 벗어버린 건 아닌지 의아할 정도였다. 하지만 일상이 반복되고 환경에 익숙해지자 슬며시 빈자리가 만져진다.
자연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찰나 함께 나눌 누군가가 없다는 슬픔이 차올랐다
-실벵테송의 <시베리아의 숲에서>-
좋은 것도 함께 나눌 때 행복이 누룩처럼 부풀어 오른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기억해 낸 것이다. 싸우다 정든다고, 못 견딜 것 같아 떠나 보니 그 빈자리가 느껴진 것이다.
결국 인간은 함께 해야 하는 존재라는 진리를 머리가 아닌 존재로서 깨닫는다.
어느 날 소식 한통이 날아든다. 이별 통보다. ‘부평초처럼 떠도는 남자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노라 ‘는 여자 친구의 메시지다.
그렇게 관계가 연결되자 신기하게도 온순하던 시간이 돌변한다. 없는 듯 무심히 흐르던 시간이 까탈을 부리기 시작한다. 관심 둘 무엇 하나 없는 오두막 한쪽에 심술궂게 눌러앉은 실연의 고통을 날로 견뎌야 했다. 수 천 킬로미터를 날아 도착한 한 줄의 정보와 관계의 끈이 달군 쇠보다 뜨겁다.
보드카로 고통을 달래며 반려견을 부둥켜안고 오열해보지만, 등을 내주고 털로 눈물은 받아줄지언정 등을 다독여주진 못한다.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지점이다.
생각해 보면 등을 도닥이다가도 쓰디쓴 실책의 원인을 짚어주지 못해 안달하는 게 우리 아닌가.
관계의 딜레마다.
체온이 그리워 다가가지만 어느새 못 견디게 고통스러워지는.
그 딜레마를 확인한 채 그는 바이칼을 떠난다.
고통은 피하고 따듯함만을 누리는 관계의 황금 거리가 존재하긴 하는 걸까. 그걸 깨달아 고통 없이 행복하게만 살다 간 사람이 있을까. 만일 있다면 그는 인간계를 벗어난 존재일 것이다.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해 보여도 함께 살아감으로 인한 괴로움에 예외란 없다. 아니라고 한다면 자기기만이거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관심을 딴 데로 돌리는 돌려막기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함께 있다는 것, 생각보다 지혜와 요령이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방법을 배우지 않았다. 관계가 어려운 이유다. 낮의 일로 밤잠 못 이뤄 뒤척이는가 하면 무심코 밤에 보낸 메시지 때문에 낮에 동료 눈길을 피하는 존재, 그게 우리다.
관계에 치어 괴로움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 우리는 떠남을 꿈꾼다. 그래서 떠나 보지만 돌아오는 길 보이는 마을 어귀로부터 안도감을 느낀다. 늘 그곳에 존재하는 붙박이의 가치다.
여행이 좋은건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돌아갈 곳 없는 방랑을 우리는 원치 않는다. 미우나 고우나 뿌리내리고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게 문명화된 인간의 숙명임을 영혼이 먼저 느끼는 거다.
쉼과 회복을 위해서는 관심과 주의력을 독차지해 진짜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만드는 것들을 떠나 홀로 있는 시간을 만들어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기 위해 각자의 삶 한쪽에 적막한 사막을 만들어 보란다.
하지만 관계와 정보 중독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자기만의 카렌시아(Carencia)를 마련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적막한 사막 위로 깨달음의 별이 떠오르기도 전에 이미 외로움에 무릎을 꿇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 인간은 갈수록 고독과는 멀어지는 존재가 아닐까.
* 카렌시아(carentia) : 스페인어로 투우 경기장에서 투우사와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소가 잠시 쉬는 곳으로 피난처 안식처를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