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에서 누군가와 ‘썸’을 타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상대가 어느날 혜성처럼 등장한 신입 회원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면? 그보다 불안하고 조바심 나는 일도 없을 거다. 게다가 그가 나보다 잘났다고 생각되어 열등감까지 올라온다면? 고통은 배가 될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레빈이 그 고통 가운데 있다.
좋은 사람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기대하며 들떠 있던 레빈은 뜻밖의 인물의 등장에 급 우울해진다. 넓은 아량으로 늘 푸근하게 감싸주는 노 공작 대신 모자에 달린 리본을 뒤로 멋들어지게 늘어뜨린 젊은 신사가 마차에서 내린 거다. 그의 세련된 미소와 자신감 넘치는 동작은 스스로 사교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레빈의 열등감을 자극한다.
그 순간 레빈의 눈에는 렌즈가 장착된다. 그러자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갑자기 그 젊은 신사가 자신이 힘겹게 쟁취한 행복을 가로챌 약탈자로 보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강력한 경쟁자가 끼어들 때의 불안과 초조함을 심리 묘사의 대가 톨스토이가 놓칠 리 없다.
이처럼 우리를 의혹의 지옥으로 몰고가는 갈등은 특정 상황을 인지(認知)하면서 시작된다.
그 누구보다 가증스러운 사람은 키티였다. 신사는 자신이 이 시골에 방문한 것이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축제라도 되는 것처럼 우쭐대고 있었고 그 태도에 키티가 굴복하는 모양새가 혐오스러웠다. 특히 짜증이 났던 것은 키티가 신사의 미소에 응할 때 보인 평소와는 다른 미소였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아내가 사랑방 손님에게 푹 빠졌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의심의 늪에 빠진 레빈의 눈은 놀란 고양이의 동공처럼 좁아졌다. 그토록 소중하고 사랑스럽던 아내마저 혐오스럽다. 어떻게 이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관찰이 아닌 해석을 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환경이 보내는 자극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주관적인 가치를 담아 해석을 한다.
늦은 밤 컴퓨터를 응시하고 있는 아이를 보고 ‘어휴! 또 딴짓하고 있네’라고 생각하는 게 해석이다. 아이 부모일 가능성이 크다.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을 한 것이다. 한편 '초등학교 5학년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책상 위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다'는 관찰이다. 셜록 홈스 같은 탐정들의 특기다. 훈련 없이는 쉽지 않다는 뜻이다. 다리를 꼰 채 뒤로 기대앉아 있는 학생을 버릇없다고 생각하는 게 해석이다. 학생은 공손해야 한다라고 하는 가치가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관찰과 달리 해석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가치가 개입된다.
문제는 해석을 통해 만들어진 현실이 틀림이 없는 사실이라고 믿을 때다.
멀리서 온 신사에게 아내가 푹 빠져버렸다고 해석한 레빈의 착각은 점입가경에 들어간다. 한술 더 떠 옳다고 판단한 것을 지지하고 강화해주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집하는 자기 충족적 예언까지 더해진다.
'옳다구나. 사냥 가는 것을 막는 걸 보니 저 녀석과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은 거야...‘
아내의 모든 언행은 연적(戀敵)을 기쁘게 하기 위한 노력이 되어버린다. 그러자 영역을 침범당한 데다가 아내마저 침략자와 한 패가 되어버렸다고 믿게 된 레빈은 질식 직전까지 간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우리도 종종 경험한다.
이처럼 우리는 종종 주관적 해석과 자기 충족적 예언이 합심해 파놓은 의혹의 구덩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관계가 불안하거나 자신감이 떨어질수록 해석, 판단, 추측은 늘어가고 마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비극이 된다. 관계 관리가 중요한 이유다.
“야! 너 요즘 왜 내 얼굴 잘 안봐? 무슨 일 있어?” 이렇게 확인 한 번이면 될 일을 해석에 해석을 거듭하며 며칠씩 개미지옥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레빈이 그렇듯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속 좁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데 입과 머리는 거짓말을 해도 몸은 거짓말을 못한다. 표정과 몸짓이 다 말한다. 밴댕이 속을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더 유쾌하게 행동하지만 레빈이 삐져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정작 본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