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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동혁 Feb 17. 2023

'객관의 세계'라고 하는 신

시스템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협력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중심에는 마치 빙하처럼 하얗게 빛나는 신전이 서 있다. 신전 앞에는 자신의 삶을 신탁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 밝고 투명하게 빛나는 신전의 이름은 ‘객관의 세계’다. 이 신전은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의 이성으로 구축되어 왔다. 고대 로마인들이 카피톨리노 언덕에 신전을 세우고 삶을 신탁했듯 우리는 이 객관의 세계에 따라 움직인다.

  이 위대해 보이는 신전은 수십만 년 전 어느 인간들이 "우리 허리끈 아래는 치지 맙시다!"나 "이 이상하게 생긴 것 먹으면 배가 아파"처럼 작은 기준들이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즉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작은 산호초와도 같던 기준 더미가 시간이 지나며 거대한 신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엔 그 어떤 인간도 이 객관의 신을 거역해 살 수가 없다.

  세계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신전 아래로는 짙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수십만 년 동안 존재해 온 이 바다는 개인의 욕망과 신념으로 이루어진 ‘주관의 세계'다. 그 세계는 너무도 깊고 어두워 밑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을 뒤엎을 만한 강력한 힘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객관의 세계라는 신전을 통과하지 않고 주관의 세계를 인정받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옷을 벗고 침실로 들어가기 전에는 말이다. 

  문득 속초에 가고 싶어 졌다고 하자. 밤바다를 보고파하는 욕망, 주관의 세계다. 그런데 이 주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객관의 세계를 거쳐야 한다. 먼저 옷을 꺼내 입어야 한다. '도리' 또는 '불문율', '상식', '에티켓'이라고 하는 객관의 세계다. 그러지 않고 나갔다가는 얼마 못 가 원치 않는 SNS 데뷔를 하게 될 것이다. '공연음란죄'라는 죄 몫으로. 객관의 세계 상층부에 있는 '법'이다. 그 아래에 '도덕'과 '윤리'가 있다. 

  열심히 기도하다가 신을 만났다는 사실이 과거엔 통했다. 하지만 이제는 열 명이 같은 방식으로 신을 만나지 못하면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잘못하다간 병원을 추천받을 수도 있다. 객관의 세계 정점인 ‘과학'이다. 한국에서 잰 내 몸무게는 전 세계 어디서든 통용된다. 

  역설적이게도 개인이 강조될수록 객관의 세계라고 하는 신전은 커져만 간다. 50년 전만 해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어딨어"라는 말을 무용담처럼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주관의 세계)을 상대에게 표현하는 건 죄가 아니었다. 심지어 '패기'나 '열정'으로 포장되어 권장? 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바로 신고에 들어간다. 범죄기 때문이다.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고육지책일 것이다. 이처럼 개인이 피해 입는 걸 막기 위해 ‘스토킹 방지법’이라고 하는 객관의 세계가 생긴다.

  이처럼 우리는 주관의 세계와 객관의 세계에 동시에 존재한다. 아니 주관의 세계 위에 객관의 세계가 군림한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무엇일까. 갈등은 도리나 매너 에티켓과 같은 객관의 세계 기슭과 욕망이나 신념이라고 하는 바다가 만나는 접점에서 일어난다. 객관의 세계와 주관의 세계가 모호하게 중첩된 영역이다. 

  회식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신입사원이 사라졌다. 부장을 넘어뜨리고 나갔다면 범죄가 되지만 몰래 사라지면 갈등이 된다. 매너가 아니라는 거다. 신혼여행 다녀온 며느리가 시어머니 선물로 예쁜 열쇠고리를 준비한다면 갈등이 될 수 있다. 도리가 아니란 구설수에 휩싸일 수 있다. 이런 행동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란 쉽지 않다. 시대에 따라 다르고 세대나 문화에 따라 다르다.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이런 갈등 상황에 빠질 때 우리는 서로 질세라 객관의 신전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호소한다. 내가 좀 더 당신과 가깝지 않느냐고. 그걸 입증하기 위해 때로는 주위 사람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렇게 갈등 당사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유사한 문제가 반복될 때 또 하나의 객관의 세계 신이 생겨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개인의 문제를 객관의 세계에 편입시키기 위한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요즘 가장 핫한 게 '비동의 간음죄'일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우리 사회가 서구에 비해 객관의 신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걸 경험했다. 서로 의식하고 감시하고. 안전하려면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안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지만 인간사 모두를 객관의 신에게 맡길 수는 없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당사자 간에 자율적으로 풀어나갈 여지를 남겨 놓아야 한다. 그게 우리가 AI나 동물이 아니라는 증거다.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지만 서로 조율하고 협력할 줄도 아는 존재. 그 자발성을 인정하는 것이 조직이나 사회가 성숙으로 가는 길이다. 사고를 줄이겠다고 무작정 도로에 카메라나 과속방지턱을 설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객관의 신에 무조건 신탁하지 않고 서로 원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건 뭘까.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상대 마음과 의도를 오류 없이 읽어내고 내 마음과 의도를 상대에게 제대로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더불어서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며 그 이기심을 통제할 강력한 권력을 가진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하는 '리바이어던(Leviathan)'적 전제보다는 충분히 유의미하게 공감하고 협력할 줄 하는 DNA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해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단지 객관의 신의 노예가 아니라 그 세계를 관리하는 존엄을 가진 존재로 남을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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