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들은 원래 그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익숙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기억하고 싶다. 그 문장들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낀 작은 동요를. 앞으로도 소설을 쓸 때마다 그때의 느낌을 떠올릴 것이다.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가 몇 번이든 간에 다시, 매번 새롭게 또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간직 채….”
작가노트 <인용된 것, 인용되지 않은 것>.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전하영
한 순간의 장면이 나를 과거로 끌고 내려간다. 흑백의 공간에서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이 메스껍다. 허우적거림이 어색하다. 어째서 나는 저런 식으로 움직이느냐 말이다. 옷은 또 왜 저래. 나에게 이러한 기억을 남긴 것은 분명히 남인데, 그 기억에서 나타난 타인은 언제나 눈코귀가 없는 계란이다. 결코 타인은 얼굴을 가질 수 없다. 나의 이야기가 매번 재구성된다. 이야기에는 언제나 생채기가 있다. 누가 나에게 이런 상흔을 남겼을까. 어째서 상처로 남아있는 것일까.
과거의 나는 항상 부끄러웠다. 이십대 초중반의 창피한 삶이다. 정확하게 스물다섯을 넘어선 시점의 기억부터는 그다지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일까. 19세의 사회적 성인 변성 나이는 나에게는 25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의 미운 24살은 대학의 시절을 일순간 넘어 방학 없는 인생으로 넘어왔다. ‘아무튼’은 언제나 과거에게 무심함을 부여하는 단어이다. 항상 요긴하게 쓰인다. 회피의 표현인 것이다.
이러저러한 삶을 떠나보낸 지금이다. 연속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삶을 사는 우리는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믿는다.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쪽이 현재의 정체성에 의미를 주입시킬 거의 유일한 경로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기억과 함께 살고 있지만 가끔은 그것을 부인한다. 분명 잘못되었었던 것이라고.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자세임에는 틀림없다. 굴욕의 감정은 언제나 느끼는 감정이라, 부인하지 않으면 매번 무너져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과도기의 삶은 언제나 부끄럽다. 그러한 민망함이 어느 시점으로 멈출지는 알 수 없다. 지금도 사실 부끄러운 시절을 지내고 있을지 모른다. 마흔, 또는 그 이상의 나는 지금의 어린 32살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볼지가 궁금하다. 사실 아주 조금은 기대가 되는데, 착각에 빠진 지금의 나는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32살을 떠나보낸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죽는 그 순간까지 나의 삶을 과도기적 삶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인데, 그런 민망함을 버틸 자신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