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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정 Apr 03. 2020

당신의 수상한 이웃

‘혼자 살기 시작했습니다’ 책 에필로그에 옆집 부부가 처음 만나 인사를 건네자마자 아이가 몇 살이냐고 물었던 에피소드를 적었다. 그때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웃들이 나의 신상 중 단 하나, 결혼을 했는지 (혹은 아이는 있는지) 묻게 될 줄 몰랐다. 한국의 평범한 여성 1인 가구답게 ‘혼자 사는 티를 안 내는데’ 익숙해진 나는 이웃들의 단 하나의 질문에 매번 당황했다. 이전에 살던 빌라의 1인 가구 이웃들은 서로 유령처럼 스쳐 지나가기만 했는데... 나는 어느 날은 가상의 남편을 둔 신혼부부가 되었다가, 어느 날은 혼자 산다고 실토하는 수상한 이웃이 되었다. 


1

인테리어 준비를 하기 위해 인테리어 업체분들과 기존 입주자분들이 살고 있는 집에 들렀다. 입주자 분들은 아이가 하나 있는 부부였는데, 두 분 모두 쾌활한 성격으로 적극적으로 집을 보여주셨다. 남편분이 작은 방의 수치를 재고 계신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께 넌지시 물었다.


“저... 아이가 있으신가요?”

“저희도 잘... 직접 물어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바로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그 아이가 내 아이라는 걸 깨닫고, 대답했다.


“없습니다.”


남편분은 내 대답을 듣고 비록 아이가 없지만 걱정할 것 없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신혼 첫 집으로 시작하기에도 최고라며, 좋은 집을 골랐다며 연신 축하의 말을 건넸다. 하하... 네... 혼자 살아도 좋긴 한데요. 이 말은 삼킨 채, 물은 새지 않는지 겨울에 외풍은 심한지 질문을 던지며 말을 돌렸다.


2

이사를 오고 나서 통장님과의 만남이 있었다. 통장님은 최근에 구청에서 나눠주는 마스크를 전달하기 위해 집집마다 돌아다니기도 하셨다. 통장, 반장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통장님의 연락에 집에 늦게 들어간다고 답장을 하자, 통장님 동 앞에서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만나자고 했다. 늦은 밤, 으슥한 현관 옆에서 종이에 사인을 했다. 홈웨어 차림의 통장님과 밀거래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도 못 주무시고 이 시간에... 고생 많으십니다.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나에 대해 그 어떤 것도 궁금해하지 않던 통장님이 질문을 던졌다.


“신랑은 아직 안 들어왔나 봐요?”


신랑... 계속 우리 집 안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그 가상의 남편 말인가. 이쯤 되면 이름도 하나 지어둘걸 싶었다. 아, 네... 어느새 또 신혼부부가 된 나는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렸다. 아무래도... 이름을 지어놔야겠어.


3

인테리어를 완성하고, ‘플랜테리어’라는 것을 해보기 위해 화분을 사러 동네 근처 화훼 마을에 갔다. 버스를 타고 조금만 가면 되는 곳이라 가서 보고 너무 크면 배송을 해달라고 할 참이었다. 근사한 야자나무를 하나 골랐는데, 사이즈가 애매했다. 내가 들고 가긴 조금 컸는데 무게 자체는 별로 안 무거웠다. 사장님은 배송은 어렵다고, 내가 들고 갈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하기 시작했다. 들고 버스까지 타야 하는데... 조금 고민하다 화분을 품에 안고 가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내가 조금 안쓰럽다는 듯 사장님이 한마디를 더했다.  


“다음엔 아빠랑 같이 와요. 차 가지고.”


아빠...? 우리 아빠...? 30대 중반의 나도 화분 살 때 아빠랑 와야 되나? 화분을 안고 걸어 나가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대화에서 ‘아빠’란 또 그 남편(아직 이름이 없다)을 뜻한다는 걸 몇 걸음 후에 깨달았다. 아빠도 남편도 없이 나는 야자나무를 무사히 들고 집에 왔다. 누가 들고 오느냐는 애초에 식물의 세계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야자나무는 나의 과오로 1년이 지난 후 쓸쓸히 우리 집에서 죽음을 맞이 했다. 


4

옆집 부부 외에는 복도에서 마주친 이웃이 없었는데, 몇 달 후 복도 맨 끝집에 사는 이웃 할머니를 출근길에 마주쳤다. 할머니는 내가 문에서 나오는 걸 발견하자마자 속사포처럼 인사를 건넸다. 인상이 좋으신 분이다.


“아니, 이 집은 사람이 안 사는 줄 알았어. 내가 공사하는 건 봤거든? 근데 아무 소리가 안 나는 거야. 사람이 안 사나 했지. 정말 조용해. 알고 보니 이렇게 이쁜 새댁이 사는구먼. 회사 가? 신랑이랑 결혼해서 이사 왔어?”


하하... 네... 이쁜 새댁은 웃으며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몇 달 후에는 '집이 조용한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집은 신랑이 없는 거 같아...'라고 걱정을 하실 것 같았지만, 더 길게 말할 시간도 없었다. 할머니, 혹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생각이 맞습니다. 이 집은 신랑이 없어요.


5.

이사 오자마자 집 앞의 필라테스 스튜디오에 다니고 있는데, 어느 날 탈의실에서 부동산 사장님을 만났다. 오랜만에 인사하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지만, 동네의 거의 유일한 아는 사람을 만난 게 반가워 인사를 드렸다. 사장님은 날 잘 못 알아본 듯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이 동네에서 손님이 워낙 많을 테니 알아보지 못할 만하다. 한 시간 동안 함께 땀을 흘리고, 다시 탈의실에서 만났다. 사장님은 환히 웃으며 내가 누군지 기억이 났다고 했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인사를 하고 탈의실을 나가려는 참이었다. 사장님의 목소리가 내 어깨를 잡았다.


“저기... 저기! 그런데... 혼자 살아요? 둘이 살아요?”


내 이름도 성도 기억이 안 나지만, 나에 대한 단 하나의 궁금증은 기억이 나신 것이다. 집을 보러 갈 때나 계약할 때 모두 가족이나 친척들과 함께 가서 사장님을 혼란에 빠뜨린 듯했다. 이 정도 궁금해하는 이웃에게는 진실을 밝혀도 되지 않나 싶었다. 


“혼자 살아요.”


사장님은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는 듯이, 아유 그런 것 같았어. 하며 개운하게 웃었다.



다음은 인테리어 공사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 


+

@around_jun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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