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잘' 산다
자존감이 유행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많이 쓰이지는 않는 말이었는데 최근에는 이곳저곳에서 만병통치약으로 활용되고 있다. 실연의 상처도 사회생활의 어려움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자존감을 높이면 해결된다고 한다.그렇게 좋다는데 안 높일 이유가 없다.
그런데 자존감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일까?
자존감 :
자신에 대한 존엄성이 타인들의 외적인 인정이나 칭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 내부의 성숙된 사고와 가치에 의해 얻어지는 개인의 의식을 말한다.
- 사회복지학 사전
역시 사전이라 말이 너무 어렵다. 내 식대로 풀어쓰자면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나의 행복이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는 자존감이 높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나의 행복을 나 자신에서 찾지 못하고 타인과의 관계, 특히 연애에서 찾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의 나는 남자 친구가 없는 기간이 거의 없었다. 그때는 더 많이 외로워했고 남자 친구를 더 필요로 했다. 남자 친구가 있는 상태가 안정적인 상태, 없는 상태는 다소 불안정한 상태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챙겨준다는 느낌이 크게 중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연애가 끝날 때마다 상실감이 컸다.
상실감의 이유는 그 사람 자체를 잃은 것이 슬퍼서였기도 했지만 '남자 친구'라는 존재가 없어져서이기도 했다. 오늘 저녁에 뭘 먹었는지, 학교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고 주말이면 함께 시간을 보내줄 사람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많이 바뀌었다
물론 연애는 언제나 좋다. 가장 친한 친구가 생긴다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오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를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 알 수 없던 생각들을 알게 된다. 어마어마한 일이다. 연애가 인생을 한층 더 풍부하고 다채롭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불행하거나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지금의 나는 혼자 있어도 행복하고, 같이 있어도 행복하다.
퇴근 후 저녁, 좋아하는 사람과 근사한 곳에서 저녁식사를 해도 좋고 나 혼자 영화를 보러 가도 좋다. 평범한 주말, 그와 함께 교외로 드라이브를 가도 좋고 여자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어도 좋다. 사랑하는 이와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해도 좋고 홀로 운동을 가도 좋다.
거절에 대한 태도도 바뀌었다.
더 어렸던 시절에는 실연을 당하면 나의 가치가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나를 매력적으로 봐주고 사랑해주는 다른 사람을 빨리 찾아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혹시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지라도 내가 매력이 없다거나 뭔가를 잘못했다고 자책하지는 않는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그 사실이 크게 아프지 않다.
이렇게 변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몰두할 일과 안정적인 수입을 주는 직업이 생긴 것, 즐거운 취미이자 체력 향상의 일등공신인 운동에 빠지게 된 것, 연애와 인간관계 자체에 경험이 쌓인 것 등이 중요한 원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큰 이유가 여행인 것 같다. 특히 나 혼자 여행을 많이 한 것이 자존감 향상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함께 하는 여행도 좋지만 홀로 하는 여행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의 낯선 땅에 온전히 혼자 존재하는 일은 '나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에 있어 다음과 같은 도움을 준다.
1. 나 혼자서도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파리행 메가버스 탑승 목록에 실수로 내 이름이 빠졌을 때 버스 기사와 싸우는 것부터-덩치가 내 두배는 되었고 프랑스식 영어를 써서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베를린행 기차가 연착되었을 때 보상 청구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것-프로세스가 독일인 기준으로만 설계되어 있어서 직원과 한참을 상의했다-, 연착으로 환승할 비행기 보딩 시간에 늦었을 때 베이징 공항을 질주하는 것-베이징 공항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자정이 넘은 시각 노숙인으로 가득 찬 로마 떼르미니 역을 지나 약 30분 거리의 숙소까지 걸어가는 것-정말 무서웠다-까지 낯선 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기댈 사람 없이 전부 혼자 해야 한다.
해보지 않으면 '나 혼자 낯선 외국 땅에서 어떻게 그걸 다 처리하지, 무서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혼자 할 수 있다. 혼자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감이 생긴다.
2. 내가 혼자 있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처음에 홀로 여행을 하기 전에는 나 혼자 여행하면 심심하지는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여행하며 깨달은 결과 나는 정말 혼자서도 잘 노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나는 같이 노는 걸 참 좋아한다. 하지만 동시에 혼자 노는 것도 정말 재미있다. 나는 혼자서도 베를린 필하모닉의 하모니를 즐길 수 있었고, 브뤼셀의 마그리트 미술관에서 마그리트에 푹 빠질 수도 있었고, 삿포로의 유명한 징기스칸집에서 양고기에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뭔가를 함에 있어서 혼자이기 때문에 포기할 게 없었다. 혼자여도 다 좋았다.
역설적으로 혼자 있어도 괜찮기 때문에 더 많이 같이 있을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바에서 만난 바텐더와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었고, 베를린의 오래된 펍에서 유학생들과 맥주 한 잔을 할 수도 있었고, 프라하의 호스텔에서 만난 아일랜드, 덴마크 친구들과 피크닉을 갈 수도 있었다. 친구들과 꼭 붙어 다녔다면 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3. 내 취향에 대해 깊이 탐구하게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산다. 그리고 그들의 취향은 나의 선택에 영향을 준다. 점심식사 메뉴를 고를 때는 직장상사의 취향을 고려하고 가고 싶은 술집을 고를 때도 친구 집과 우리 집과의 거리를 고려한다. 옷 입을 때도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것을 고른다. 가령 너무 가슴이 깊게 파인 옷은 한국문화와 잘 맞지 않기 때문에 입지 않는다. 친구와 여행을 간다면 그의 취향에 대해서 깊이 고려할 것이다. 그래서 서로 만족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을 것이다.
반면 혼자 여행을 하면 누구의 취향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 이역만리 타국이므로 한국에서처럼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내가 어디를 가고 싶고, 뭘 먹고 싶고, 뭘 하고 싶은지, 나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나에 대해 많이 배웠다.
음식 취향 : 아무거나 잘 먹는다는 것. 미식가는 못될 것 같다는 것. 맥주와 와인을 사랑한다는 것.
일정을 짜는 습관 :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이라는 것. 아주 즉흥적이라는 것. 일정표를 엑셀에 짜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답답함을 느낄 것 같다는 것.
여행지를 고르는 취향 : 자연보다는 도시를 좋아하고 쇼핑보다는 미술관을 사랑한다는 것.
낯선 이를 보는 태도 : 의외로 낯선이와 정말 잘 어울린다는 것. 외국에서 더 사교적이고 영어로 말할 때 더욱더 사교적이라는 것.
이렇게 나는 여행을 통해 혼자서도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혼자 있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에 대해 배웠다. 도시들을 여행했지만 나 자신을 여행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타인이나 외부 환경 때문에 괴롭거나 스스로 자존감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들에게 홀로 여행을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온전히 24시간 나 스스로와 함께 하면서 자신을 좀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물론 자존감이 높다고 세상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확실히 세상만사가 주는 상처에도 덜 아파하고 가야할 길을 갈 것이다. 혼자 하는 여행이 이렇게 좀 더 단단해지기 위한 좋은 준비 시간이 될 수 있다.
P.S.
이렇게 말했지만 친구, 가족과 여행 가는 것도 좋아합니다. 친구들은 여행 계획이 있다면 주저 말고 연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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