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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 Sep 20. 2017

평범한 남자

 소설을 써야겠어요. 아니, 뭐라도 써야겠어요. 쓰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을 것 같거든요. 아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닌가요? 어쨌든 지금은 쓰고 있지 않은데 쓰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 어떻게든 되는 건가요? 아니예요. 아닌 것 같아요. 아닌 거 맞죠? 소설을 써야겠어요. 소설을 쓰지 않는 다는 생각만으로도 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에요.  당장은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곧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거예요. 그게 다라면 그뿐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이 상태를 못 버티겠어요. 그래요. 소설이 아니라면 어때요. 뭐라도 쓰고 있으면 되겠죠.  오늘은 하늘이 좋네요. 아, 그래요. 하늘이 좋다. 라고 써야겠어요. 소설이 뭐 별건가요. 쓰다보면 이야기가 되는 거겠죠.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 보실래요? 그 여자는 결혼한 여자였는데 재작년 팔월쯤에 식을 올렸으니까 이년 정도 되었네요. 나이가 차서 집안의 어르신이 보여준 선을 보고 결혼을 했는데 사실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지요. 그 여자는 남편이 될 사람이 참 좋아보였거든요. 어린 시절의 치기어린 연애를 할 때의 격정적인 마음은 아니었지만 이젠 나이도 들었으니 이건 이것대로 사랑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결혼하고 두 달이 지났을까. 이 여자는 남편감으로 꽤 괜찮다고 여겨진 이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아냈어요. 아주 우연히요. 한 번도 남편의 핸드폰을 궁금해하거나 본 적이 없었는데 그 날은 자꾸만 눈이 그리로 가더래요. 그리고 알았대요.


 그것 참 웃기네요. 남편이 다른 여자가 있다니. 그래서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겠어요. 아, 그 이야기를 소설로 써볼까요? 어떨 것 같으세요? 아침드라마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소재잖아요. 바람 피는 남편이라. 그보다 흔한 이야기가 어디 있대요? 그래요. 첫 이야기는 그게 좋겠어요. 바람 피는 남편. 멍청한 아내. 그리고 또 뭐가 좋을까요? 애라도 있으면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해지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남편이 더 나빠 보일 것 같네요. 좋아요. 그게 괜찮겠어요.


 그죠? 참 흔한 이야기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듣는지 알게 된다면 아마 깜짝 놀라게 될 거예요. 도돌이표가 가득한 악보집을 읽는 것처럼 끊임없이 이야기가 들려온답니다. 하여튼 그 여자는 너무 놀란 마음에 남편의 핸드폰을 꼭 쥐고 그 길로 현관으로 나갔어요. 문을 열고 밖을 나서니 정오의 해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어찌나 밝은지 도통 눈을 다시 뜰 수가 없더래요. 닫히지 않은 현관문을 그대로 꼭 잡고서 그 여자는 눈을 감은 그대로 서 있었는데 볕이 눈을 멀게 할 것 같았다나뭐라나.  물론 괜찮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현관문을 나선 30대의 어떤 여성이 8월의 햇살에 갑자기 눈이 멀어버렸대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이니까. 다 그렇게 이상한 듯 아닌 듯 흘러가버리는 거니까. 이대로 눈을 뜨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대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몇 달 전 빨래감에 있던 남편의 셔츠 깃에 묻은 모르는 색의 립스틱 자욱도. 차의 네비게이션에 저장 된 익숙지 않은 목적지도. 이미 알고 있는 그 여자의 번호가 이름 모를 차장님의 이름으로 돌변해 핸드폰 액정에 뜬 것도.


 참 칠칠맞은 남자네요. 결혼 이년 만에 들킨 것도 모자라 가지가지한다는 말이 이럴 때 쓰지 언제 쓰겠어요. 듣다보니 기분이 나빠지네요. 이상한 남자예요. 참 이상한 남자예요. 좀 더 숨기면 좋았잖아요.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게 바람이라던데 무슨 베짱인지. 소설로는 안되겠어요. 아무래도 남자 주인공이 매력이 없는 것 같아요. 주인공은 그래선 안되잖아요. 좀 더 멋진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쓰고 싶어요. 죽음 앞에서도 절절한 일편단심 캐릭터나 카사노바가 남부럽지 않게 매일 밤 다른 여자를 만나는 마성의 캐릭터 정도는 되어야 독자들이 좋아하지 않을까요? 남들이 많이 보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나 혼자서만 쓰고 만족하면 그게 무슨 의미람? 남들도 좋아하는 이야기 있잖아요. 읽고 싶고 궁금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평범한 이야기는 싫어요. 평범한 사람두요. 평범한 사람들은 언제나 한 끗이 모자라요. 예측할 수도 없구요. 성격도 없고 특징도 없고 그저 수많은 사람 중 하나, 그 이상 이하도 아니잖아요.


 그래요. 참 평범하죠? 이 여자는 그 평범한 남자가 참 좋았대요. 그리고 이 여자는 잡고 있던 현관문을 놓았대요. 그리고 침대 가장자리에 원래 있던 대로 핸드폰을 두고 부엌으로 가 저녁으로 먹을 찌개에 필요한 채소들을 다듬었대요.


 .......


 이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기로 결정했대요. 그 여자가 한 건 그게 다예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 그게 전부예요.


 왜 그랬대요?


 모르겠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래요, 왜 그랬을까요. 주책스럽게 눈물은 왜 나고 난리람. 이제 그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소설을 써야 하거든요. 소설의 주인공을 정했어요. 평범한 남자와 평범한 여자가 주인공이에요. 아닌가? 평범한 남자와 바보 같은 여자가 주인공인가요? 바람 핀 남편을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여자가 주인공이겠네요. 왜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갔냐면요.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려두었거든요. 두부찌개를 끓이려고 물을 올려놨는데 그만 깜빡했지 뭐예요. 그 못난 남자에게 밥을 해주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일단 물을 올려놨으니까. 물이 끓으니까. 불을 안 끄면 물이 다 쫄아들테니까. 아, 그 남자는 목욕을 오래해요. 그러니까 목욕하느라 부엌에서 물이 끓다 못해 냄비 바닥이 바짝 마르도록 씻고 있었을 게 분명해요. 처음엔 무슨 남자가 목욕을 한 시간씩이나 할까? 도대체 뭘 하길래 그렇게 걸리는 걸까. 했었는데 목욕을 하고 나온 그 남자 몸에서 비누 냄새가 얼마나 진한지. 분명 나와 같은 비누를 쓰는데. 아, 목욕을 하는 시간에 비례해 몸에서 비누 냄새가 오래 가는 걸까요? 그런가 봐요. 저녁준비를 하고 있으면 왼쪽 어깨너머로 비누 향이 나요. 그 비누를 더 사놔야겠어요. 향이 참 좋거든요. 가스레인지의 열기에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그런 향이에요. 왜 이야기가 샜을까요? 그래요. 가스레인지의 불까지 이야기했죠? 가스레인지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시죠? 저희 집이 복도식 아파트라서 우리 집에 불이나면 삽시간에 옆집으로 불이 옮겨 붙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항상 가스레인지를 유심히 봐요. 혹시라도 불이나면 안되니까. 언제부터일까요? 나를 만나기 전부터일까요? 아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나보다 먼저일지도. 사실 결혼을 전제로 선을 본 거라 오래 만나지 않고 바로 결혼을 하게 되었거든요. 그래도 사계절은 만났네요. 다들 그러더라구요. 사계절은 만나봐야 한다고. 웃는 모습이 참 예뻤거든요. 그 남자. 그래서 나머진 다 괜찮다 생각했나봐요. 나도 참. 미쳤지. 그때가 내 생일 근처니까 삼월이었을거예요. 며칠 동안 어찌나 춥던지 한 겨울이 다시 온 줄 알았는데 그 날은 유달리 따뜻했어요. 그래서 새구두도 꺼내 신었죠. 아끼던 거라 안 신고 신발장에 몇 달을 있던 거였는데... 날이 따뜻해도 아직은 무리였던지 발이 꽁꽁 얼어서 뒷꿈치가 어찌나 아팠게요. 두 번째 데이트였는데 발이 아프니 그만 걷자. 그런 소리를 어떻게 해요. 그냥 참았는데 피가 났던지 스타킹에 붉은 피가 배어나와 아이보리색 구두 뒷꿈치로 보였나봐요. 어찌나 놀래던지. 지금 생각해도 웃겨요. 하하하. 누가 보면 자기가 다친 줄 알 것처럼 어찌나 호들갑을 떨더라구요. 사실 여자들은 다 알잖아요. 새구두 연례 행사같은 거라 해야 하나? 근데 내가 발목이라도 잘린 것처럼 어쩔 줄 몰라하더니 코트를 냅다 벗어 보도블럭에 깔고 나를 대뜸 앉히지 뭐예요. 내 구두를 벗기는데 피가 엉겨붙었는지 인상이 찡그려졌어요. 그 당황하는 표정이라니. 그 당황하던 표정이라니.


 그냥. 나는 그냥, 사랑했을 뿐이에요. 당황한 얼굴로 내 구두를 조심스레 벗기던 그 남자를, 한 시간씩이나 목욕하며 온 집에 비누 냄새를 풍기던 그 남자를. 내가 해준 두부찌개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그 남자를. 나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그 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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