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융통성 없는 아이라는 말을 자주, 많이, 잊을만하면 들어왔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그 말이 남들과 다른 특별한 아이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남들이 그 단어를 말할 때 쓰는 미묘한 뉘앙스 대신에 그 단어를 '대쪽같은 성격' 정도로 단어의 의미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엔 작은 학교 탓에 3, 4학년 동안 한 선생님이 담임을 연거푸 맡기도 하셨는데 그 선생님은 내게 악감정이라도 있으셨던 건지 구구절절 칭찬의 끝에 항상 다 좋은데 '그러나' 융통성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꼭 붙여 가정통신문을 나눠주셨고 난 성적표 가득한 '수'에도 불구하고 늘 엄마에게 혼이 났다.
"그러게, 선생님도 아시잖니. 융통성이 없다는 거. 엄마가 없는 소리하는 게 아니라니까."
"......"
엄마는 그렇게 학기가 끝날 때마다 내가 집으로 들고 오는 성적표를 보며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있다는 것에 위안을 얻어 신난 듯 보였으나 난 아무리 곰곰이 생각을 해도 그게 왜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융통성이 없다니. 그게 도대체 뭐가 어때서. 융통성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가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성질의 한 종류로 구분하지 않고 융통성이 없는 게 꼭 어디 도덕성이라도 하나 결여된 듯 구는 게 싫었다. 그렇게 나는 유별난 사람이 되고 마는 걸까.
그럼 되고 말지 뭐. 나 스스로에게 따져 물으니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난 유별난 사람이다. 그 사실에 대한 반감도 없고 더하자면 유별나지 않은 사람은 내게 매력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내가 가진 '유별남'에 대한 생각은 긍정적인 편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사람으로 불리는 게 왜 싫냐고 하면 그건 유별난 사람이라는 딱지가 싫다기보다 그 어휘를 말하는 사람이 주는 태도, 어감이 싫기 때문이다. 일체의 감정적 판단을 제외한 '다르다'의 의미가 아닌 네가 다름으로써 다른 이에게 해악이 될지도 모르는 '다르다'의 유별남.
그런 내게-다른 이들과는 다른 유별남을 가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벽이기도 하다. 세상에 100명의 사람이 산다고 하면 100개의 유별남과 100개의 다름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려면 응당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융통성 없는 내가 융통성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한 자기 방어의 수단인 것이다. 다수가 그러하기 때문에 내가 법을 어기고 규칙을 어기는 한이 있어도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면 난 어김없이 이 카드를 꺼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법이 있고 규칙이 있는 이유는 있다.'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융통성에 지지 않는 나같은 사람이 있어도 괜찮을 만큼 이 세상엔 융통성 넘치는 남의 눈치만 보며 편승하는 이들이 많으니 나 하나 정도는 좀 건들지 말고 봐주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다 저만 옳다고 여기는 세상에서, 공통의 선, 도덕, 가치, 법과 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하는 것들을 발견해가며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지 않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이 실제를 규정하지 않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가 규칙에 의해 희생을 강요받지 않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