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방 안이 환했다. 천장도 높고 하앴고 아침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공기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머리맡엔 흰 베개가 푹신하게 베어져 있었다. 몸을 덮은 흰 이불은 내가 집에서 덮는 그런 낡아 빠진 것이 아니었다. 집이 아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깨끗한 시트가 깔린 침대, 거울처럼 반짝거리는 대리석 바닥, 화려하고 넓은 방, 창 밖으로 보이는 방콕 시내의 높은 빌딩들. ‘여기가 어디지?’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 어젯밤 수염쟁이 한국 남자랑 저녁을 먹고 포도 주스를 마셨다.
그걸 벌컥벌컥 마신 후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국 갈 거야!’ 하고 내가 외친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리고 쓰러진 것 같다. 그럼 여긴 그의 호텔방?? 그럼 그가 나를 어떻게 한 건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문으로 돌진했다. 문을 열자 황금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서 있었다. 깨끗한 옷차림으로 커다란 트렁크가 옆에 놓여 있었다. 그가 한국말을 했다.
“이제 일어났어요? 빨리 나갑시다!”
나는 바로 소리쳤다.
“ไอ้คนเลว! นายทำอะไรฉัน? เพราะแบบนี้ถึงได้ชวนฉันไปกินข้าวเย็นหรอ? (이 나쁜 놈아! 너 나한테 뭐 했니? 이러려고 나한테 저녁 먹자고 했니?)”
그가 대강 알아먹었나 보다. 핸드폰을 터치했다.
“ผมไม่ได้ทำอะไรเลยครับ. ดูตัวเองสิ. (나 아무것도 안 했어요. 자기 자신을 보라고요.)”
아래를 쳐다보니 미키 마우스가 웃고 있었다. 어제 입은 옷차림 그대로였다. 믿을 수 있나! 그래도 그 앞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ฉันจะเชื่อคำพูดนั้นได้อย่างไร? เธอไม่ได้ทำอะไรกับฉันจริงๆหรอ?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니? 너 정말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했니?)”
미친 듯 그 앞에서 소리치자 그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보더니 한마디 했다.
“이건 뭐 고마워할 줄 모르는 여자네. 괜히 잘해줬다!”
한국말을 알아들을 순 없었다. 그가 핸드폰을 터치했다.
“ฉันจะกลับเกาหลีแล้ว. ตอนนี้ต้องออกจากห้องแล้ว! (나는 한국 간다. 지금 방을 나가야 한다!)”
나는 더 기가 막혔다.
“อะไรนะ? ทำกับฉันแบบนี้แล้วหนีไปหรอ!! ไอ้หนวดบ้า! ผู้ชายเกาหลี! (뭐라고? 나를 어떻게 해 놓고 도망간다고!! 이 미친 수염쟁이 한국 남자야!)”
그러자 그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한 손으로 트렁크를 잡고 돌아 나가며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든 상관없고!!”
어! 그가 그냥 나간다. 소리를 질러 줬다.
“นายต้องจ่ายค่าโรงแรม!!! เป็นโรงแรมราคาแพง... (호텔비는 니가 내야 한다!!! 비싼 호텔인데...)”
그가 들은 척도 안 하고 그냥 나가 버린다. 할 수 없었다. 나도 얼른 가방을 챙겨 그를 따라 나갈 수밖에.
호텔 문 앞에서 체크 아웃하고 나오는 그와 다시 마주쳤다. 내가 무서운 눈빛을 그에게 쏘자 택시를 타려던 그가 다가와 말했다.
“한국까지 나 쫓아오지 마요!”
그의 핸드폰에서 냉정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อย่าตามฉันมาถึงเกาหลีนะคะ! (사장님! 한국까지 나를 쫓아오지 마세요!)”
헐!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가 돌아서 가 택시를 탔다. 그 사이 어깨에 맨 내 가방 위에는 1,000 밧이 올려져 있었다. 나는 ‘จะอวดเงินไปจนจบเลย! (끝까지 돈 자랑 하시겠다 이거지!!)’ 소리치며 돈을 돌려주려고 쫓아갔지만 택시는 벌써 멀어져 있었다.
비닐 커버가 거의 다 헤어진 버스 의자에 겨우 앉았다. 완행 버스지만 방콕에서 출발하는 거라 그래도 자리를 잡은 것이다. 방콕을 벗어 나자 에어컨도 되지 않고 활짝 열린 창문으로는 먼지가 올라왔다. 거기다가 버스가 한번 설 때마다 사람들은 점점 많아져 버스 안은 시장 바닥처럼 변했다.
꼬꼬댁거리는 생닭을 안은 아줌마, 생선 냄새가 나는 커다란 검은 비닐을 든 아저씨, 허름한 옷차림의 할아버지, 학교 가방을 멘 학생 등등으로 버스 안이 가득 찼다.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여자 아이가 내 앞으로 와 서서 자리를 양보했다.
달리는 버스 밖으로는 햇빛에 빛이 바랜 바나나 나무와 야자수들이 지나 가는데 나는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취해서 옆으로 휘청하는데 한국 남자의 팔이 들어왔었다. 묵직하고 단단한 근육의 느낌. 그가 두 팔로 휙 내 몸을 안아 올릴 때 벌렁대던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반쯤 뜬 눈으로 보이는 가까운 그의 하얀 얼굴. 턱에는 수염이 덥수룩했지만 그 위로 드러난 하얗고 반듯한 이마, 순하고 부드러운 눈매, 그리고 몸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 나는 정신을 잃었다.
어느새 얼굴이 빨개졌다. 그걸 봤는지 앞에 있던 여자애가 올려다보며 물었다.
“พี่คะ! ทำไมเป็นแบบนั้นหละครับ? (언니! 왜 그래요?)”
“เออ?! ไม่มีอะไร (응?! 아무것도 아냐.)”
여자 애가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이 애한테 교훈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당하면 안 될 것 아닌가?
“หมายถึงว่าครั้งต่อไปเธอโตแล้วสูงเท่าฉัน ถ้าได้เจอกับผู้ชายเกาหลี จะข้ามไปไม่ได้เด็ดขาด. (너는 말이야 이다음에 커서 나만큼 커서 한국 남자 만나게 되면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
여자 애가 무슨 말이냐는 듯 나를 올려다봤다.
“ผู้ชายเกาหลีรู้จักแต่ตัวเอง! ไม่ใช่! ผู้ชายทุกคนแกล้งทำเป็นทำดีกับผู้หญิง แต่จริงๆแล้วรู้จักแต่ตัวเอง! คุณไว้ใจได้แค่ตัวคุณเองเท่านั้น! (한국 남자는 자기밖에 몰라! 아니다! 모든 남자들은 여자한테 잘해 주는 척하지만 실은 자기 밖에 몰라! 오직 믿을 건 자기 자신뿐이야!)”
여자 애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ใช่! ต้องหาเงินสิ! กลับเกาหลีกันเถอะ! (그래! 돈은 벌어야지! 한국 가자!)’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포탈 창에 ‘한국에 돈 벌러 가는 방법’을 쳤다. 그러자 ‘먼저 한국어 등급 시험과 기초 체력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안내가 떴다. 시험을 준비하는 방법, 시험 준비 후기, 여러 한국어 학원들, 체력 시험 과목, 그 외 한국으로 가는 여러 과정이 올라왔다.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한국에 가 돈을 버는 동네 언니는 일이 힘들다고 한다. 한국 농촌에서 욕을 먹으며 일한다고 살짝 언니 친구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진짜 이것저것 가릴 수가 없다. 어머니의 당뇨병은 점점 깊어가는데 병원에는 가지도 못하고 있고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들 학비는 매번 내지 못해 빚을 지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더욱 나빠만 질 것이다. 나는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