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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Nov 26. 2024

리뷰 :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오래전 한강 작가의 ‘채식 주의자’를 읽고 너무 무겁고 우울한 글에 짓눌리는 것 같아 힘들었었다. 그러나 그게 세상에 있는 온갖 종류의 폭력에 대해 저항하는 글이라는 건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한강은 이토록 시적인 문장을 쓰면서도 말하려는 바가 또렷하구나. 아니 말하려는 주제 때문에 이토록 시적인 문장을 쓰는구나!’ 생각했다.     


비교적 최근인 2021년에 낸 장편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도 마찬가지이다. 또렷하게 말하려는 바 때문에 시적인 문장들을 가득 채운 소설이다. 제주 4/3 희생자를 잊지 않겠다는 또렷한 주제 의식.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늘에서 내리다 공중으로 흩어지고 급기야는 땅에 떨어져 스며드는 눈으로 시작해 눈으로 끝난다.      


‘강풍이 먼바다의 먹구름을 흩을 때마다 햇빛이 수평선으로 떨어진다. 수천수만의 새떼 같은 눈송이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나 바다 위를 쓸려 다니다 빛과 함께 홀연히 사라진다.’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맹렬한 눈보라 속으로 포복하듯 버스를 몰기 시작한다. 울창한 삼나무 숲 사이로 일 차선 도로가 휘어든다. 박명 속에 수천 그루의 높은 나무들이 눈발 속에 흔들려, 마치 내 오랜 꿈속 검은 나무들이 아직 살아 있던 풍경 같다.’     


‘심지에서 쉼 없이 솟은 불꽃의 빛이 스며, 떨어지는 눈송이들의 중심마다 불씨가 맺힌 것처럼 보였다. 불꽃의 가장자리를 건드린 눈송이가 감전된 듯 떨며 녹아 사라졌다.’   

  

너무나 시적인 문장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지는 않는다. 하늘에서 하염없이 떨어지고 강풍에 휘몰아치고 검은 숲 위로 떨어지고 작은 촛불 위에 녹는 그 눈은 실은 1948년에서 49년 사이 제주에서 죽은 이십만 명 이상 목숨의 현현이다. 작가는 소설 전반에 압도적으로 눈을 내리게 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비참하고 억울한 그들의 죽음을 추적하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인 작가가 제주에 사는 독립 영화감독인 친구와 함께 추진하려던 프로젝트, 바닷가에 검은 나무를 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바닷가 산비탈에 99 개를 심으려던 그 검은 나무들도 제주의 죽음을 상징한다. 작가는 바닷물에 잠기는 산소를 보고 거기에서 뼈들이 나와 바닷물에 휩쓸려 가는 꿈을 연거푸 꾸며 프로젝트를 포기하려 했었다. 작가는 제주의 죽음을 잊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제주 친구인 인선에게서 서울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와 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인선은 오른손 집게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병원에서 인선이 봉합 수술 후 이어진 신경을 살리기 위해 3분마다 봉합 부분에 바늘을 찔러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걸 보며 작가는 끔찍해한다. 3분마다 일부러 상처 부위에 바늘을 찔러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건 제주의 아픔을 잊지 않겠다는 상징이다.  

    

집에 둔 앵무새를 살려 달라는 인선의 부탁을 받고 작가는 제주로 향하게 된다. 이때 제주 집에 두고 왔다는 앵무새는 희망으로 보인다.      


이렇게 소설은 수많은 상징과 은유가 시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나는 친구 인선의 봉합된 손가락 상처에 바늘을 찔러 넣어 고통을 상기시킨다는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다. 역시 노벨 문학상을 받을 만한 작가구나. 이토록 소름 끼치는 은유와 상징이라니.     


소설은 후반부에 가면 개연성이 없는 꿈과 환상으로 전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떨어지는 눈의 질감, 검은 숲과 하늘의 풍경, 죽은 새를 땅에 묻는 과정의 차가움, 서울 병원에 있는 친구가 갑자기 집에 나타나 이야기를 할 때 드러나는 표정, 그걸 밝히는 촛불의 움직임까지 너무나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이 모든 것들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제주 이십만 명의 죽음을 기술하는 건 사실 간단한 신문 기사로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아픔과 슬픔을 느끼게 하는 건 이런 소설이다. 건조한 사실에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구성과 문장의 기술 말이다.      


한강 작가는 이 소설에서 숨겨져 있던 우리의 비극인 제주 4/3 항쟁과 죽음을, ‘소년이 온다’에서는 광주 항쟁을, ‘채식주의자’에서는 가부장제의 폭력을 말하고 있다. 그걸 그냥 말로만 하지 않고 온몸으로 영혼 속에서 아픔을 느끼고 그걸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작가 의식이란 그런 것 같다. 나의 슬픔과 아픔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슬픔과 아픔을 내 몸으로 느끼고 풀어내고 시대의 메시지를 구현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작가의 역할이다. 그것 때문에 한강 작가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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