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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운 May 11. 2024

나의 아버지

내 나이 30대에 나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는 60대 노인이셨고 나는 결혼을 하고 회사에 한창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40대에 실직을 하셨고 이후 뚜렷한 직장 없이 무직으로 계셨다.     


대신 어머니가 동네에서 마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국민학생 (지금 초등학색)에서 중학생, 대학생으로 커가던 나는 아버지가 그 나이에 취직을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아버지를 무능력하고 무기력하다고 생각했다. 30대 결혼을 한 후에도 말이다.     


실직하기 전 아버지는 유명 신문사 기자였다. 우리 가족은 지방 소도시에 살았기 때문에 기자는 희소하고 또 누구나 떠받들었다. 고향이던 소도시에는 1979년까지 KBS, MBC, 조선일보, 동아일보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명절 때만 되면 집으로 선물 박스가 들어오고 여름휴가 때면 소도시 시장이 보내주는 자가용을 타고 바닷가에 해수욕을 갔던 기억이 난다. 1970년대 번듯한 단독 주택이 모여 있는 우리 동네에서도 TV가 있던 집은 우리 집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1980년 아버지의 실직은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서울 중앙에서 정부 정책에 의해 언론사 지방 지사를 통합하고 기자들을 해직시키는 강제적인 것이었다. 서울에서는 약 900명의 기자들이 해직되었다.  20년을 유력 신문사 지방 기자로 떠받들여졌던 아버지의 충격은 지금 생각해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역사는 그렇게 한 가족 와 개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아버지가 그 이후로 무기력해졌다는 거다. 작은 방에 들어간 후 잘 나오지 않으시고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는 걸 꺼려했다. 나는 그때 내가 크면 절대로 아버지 같이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은 어머니가 동네 마트를 하며 그럭저럭 살았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을 왔다. 하지만 내 여동생들은 서울로 대학을 오지 못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돈은 벌지 않고 작은 방에서 무엇을 할까 항상 불만스러웠다.     


60년 전 기자였던 아버지가 어머니과 연애하든 시절


대학 졸업 후 나는 절대 아버지 같이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아등바등 직장을 찾았다. 그즈음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무능한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힘들게 고생을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원망했다. 아버지는 눈물이 어린 얼굴로 아무 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40대를 지나며 나는 드디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에 나도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다.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무력감이 들었다. 아버지가 신문사에서 해직당했을 때의 심정 말이다. 그때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아버지와 마지막까지 함께 살았던 막내 여동생이 작은 방에서 나왔던 아버지의 유품을 보여 주었다. 볼펜으로 갈겨쓴 노트 여러 권이었다. 소설 습작들이었다. 아버지는 소설가를 지망하셨던 거다. 아마 신춘문예에도 여러 번 응모하셨을 거다. 아마 다 떨어지셨겠지.     


나는 아버지가 꿈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살아생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나를 지원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가 대학 졸업 후 취업이 되지 않아 힘들어하며 미국 어학연수를 보내 달라고 할 때 선뜻 돈을 마련해 주셨고 미국에서 돌아와서 살 자취방도 마련해 주셨다. 여동생들도 비록 지방 대학이지만 모두 졸업을 시켰다.   

  

아버지는 작은 방에서 가끔 나와 사업을 하며 벌은 돈이 있었다. 다만 아버지는 소설을 쓰고 있다고 소설가를 지망한다고 (어머니 빼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하셨다.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내게 아버지의 유산은 크다. 직업 때문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집 안에는 항상 책이 많았고 책을 읽는 분위기였다. 어린이 전집 문고 같은 것도 몇 종류를 마련해서 거실에 두었다. 또 아버지는 그 당시에도 남녀 차별을 전혀 하지 않는 분이었다. 딸 셋 있는 집이었지만 아들 얘기는 입도 뻥긋 안 했다. 공부만 잘하면 여자도 얼마든 성공하는 세상이라고 말씀하셨다.      


30대 아버지가 해경과 함께 동해 간첩 침투 사건 취재를 나갔을 때 찍은 사진


그런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가 무능하고 무기력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살아 계실 때 살갑게 안아 드리지도,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얘기하지도 못했다. 이제는 안다.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건 너무나 힘든 행운이고 아버지는 매번 좌절을 겪으면서도 가족을 끝까지 책임지셨다는 걸.      


나는 돌아가실 때까지 이해해 드리지 못했다. 데면데면 대하는 딸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돌아가신 후에게 작은 방에서 나온 소설 습작 노트들을 보며 아버지의 꿈과 인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님의 제사를 내가 모신다. 그것만이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내가 마련한 음식으로 채운 제사상 위에 향을 피우고 그 위에 술잔을 돌리며 나는 ‘아버지 사랑합니다!’하고 속으로 매번 외운다.                


* 원래 일요일 연재를 하루 당겨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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