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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척'하는 게 왜 나빠?

by 청설모

"나 커피 한잔만~"


후원을 하겠다고 찾아온 한 중년 남성은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젊은 여직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 그리고선 본인이 원하는 후원 사업이 있으니, 그 사업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우리로서는 난감한 요청이었다. 가방이 필요 없는 아이에게 가방을 후원해 주겠다고 하는 모양새나 다름없었다. 이후엔 담당자들이 잘 설득해서 현지에 꼭 필요한 사업으로 후원처를 변경하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운영 방식을 끝까지 탐탁지 않게 여겼다.


가끔씩 등장하는 이런 후원자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의 의도를 추측하곤 했다. '자기 사업 홍보하려고 후원하는 건가?' '연말에 남는 재고 처리하려고 우리한테 주는 건가?'. 그렇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결국 그들의 행동은 어린이를 돕는 일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어린이들은 더 나은 삶을 선물 받았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그래서 위선이 나빠?"


웃는 얼굴 뒤에 감춰진 진심이 선인지 악인지 다 판단할 순 없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위선도 응원하게 됐다. 이렇게 변하게 된 데에는 당당하게 썩은(?) 사람들의 영향이 크다.


예전 대선 토론회에서 트럼프는 그의 탈세를 지적하는 상대방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난 세금 내고 싶지 않아!"

세금은 강도질이고, 자신의 탈세는 똑똑한 행위라며 자랑하는 모습에 그는 박수를 받았고, 나는 경악했다.

세월호 사건이 있고 난 후, 한동안 유족들은 광화문에서 단식 투쟁을 했다. 그걸 본 한 무리는 단식 농성장 앞에서 피자를 주문해서 '폭식 농성'을 시작했다. 그들은 울고 있는 세월호 유족들 앞에 삼삼오오 앉아서 피자와 치킨을 뜯고 있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크게 소리치고 싶어졌다. 나는 당신의 솔직함을 바라지 않으니, 세상에 당신의 유해한 행동을 노출시키지 말고 제발 그냥 속에 감춰두라고. 가식이나 위선이라도 떨어달라고.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앞으로도 세상은 '자신만 챙기고, 타인을 이기고 지배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이라고 가르치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다른 의도가 있든,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든, 도덕적인 우월감에 취해서 하는 일이든 간에 선한 일을 하는 행위는 일단 박수를 쳐줘야 한다.


그리고 나는 선한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실제로 선하게 바뀔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많은 뇌 과학자들도 행동이 마음을 따라오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람의 뇌는 예측을 기반으로 에너지를 분배하기 때문에,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일단 움직여야 한단다. 헬스장에 가기 위해 일어서면, 뇌는 '이제 신체 활동 시작하겠네' 하면서 심박수도 올리고 근육으로 가는 혈류랑도 늘린다는 것이다. 결국, '에너지가 있어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행동을 하니까 에너지가 생기는 것이 맞다'는 얘기다.


때로는 행동이 나를 설득하기도 한다. 우리 후원자들 중에도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이 뭔지 몰랐는데, 후원을 일단 시작했더니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고.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후원을 시작했는데, 매달 후원금을 내면서 마음이 어린이들에게 향하게 되었다고.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그런 사람이 된다. 일단 척이라도 시작해 보자. 위선조차 귀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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