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날, 야구 경기를 보러 갔다가 갑자기 "계시' 같은 걸 받았다. 야구 방망이가 공에 맞는 순간, 그는 자신이 소설가가 되어 <군조> 신인상을 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전까지 한 번도 글을 써보지 않았던 그가 갑자기 야구 경기장에서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경험을 '본질의 돌연한 현현(epiphany)'이었다고 고백한다.
본인이 하루키와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지를 회사 사람들과 나누다가, 실제로 내 인생의 많은 부분들이 이런 직관적인 계시들에 의해 이끌려 왔다는 걸 깨닫게 됐다.
대학 시절, 학교 친구와 함께 한 후원단체에 가서 후원아동의 편지들을 접는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수북한 편지 뭉치들을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서 편지를 접다가, 문득 내가 이곳에서 일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어쩐지 여기서 일하게 될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전공을 살려 홍보회사나 홍보팀에 취직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 후원 단체는 내 옵션에 없었다. 그래서 일단 집에 돌아온 뒤, 후원 단체에 DM을 보내 채용 계획을 물어봤다.
신입 채용 계획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 난 후엔 그 단체를 깔끔하게 잊어버렸다. 그 당시 야망걸이었던 나는 대기업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그 단체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봉사활동을 하다가 갑자기 스쳐 지나간 느낌 때문에 한 번 물어본 거였으니, 신입 채용 계획이 없다는 답변을 들은 이상,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리고 5년 뒤, 나는 그 단체에 경력직으로 취직하게 된다. 출근 첫날, 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인형 뽑기 갈고리처럼 나를 들어다가 이곳에 내려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멀리 돌아서 결국 이곳에서 일하게 됐다. 5년 전 편지 작업실에서 들었던 다정한 노래가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하루키가 경험했던 저 비논리적인 직감 같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신기한 계시가 아니라, 평소 그 사람이 꿈꾸고 소망했던 것들이 특정 상황에서 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걸 운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맞게 되는 장맛비처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머리를 치고 가는 그 느낌은 항상 나를 예상하지 못한 길로 이끌었다.
하루키는 소설 쓰기에 대해 생각할 때, 야구장에서의 첫 경험을 계속 떠올린다고 했다. 어느덧 근무 10년 차가 된 나 또한, '노잼 시기'가 다가올 때마다 대학 시절 편지 작업실에서 느꼈던 '종소리'를 떠올린다. 우연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겸손해진다.
운명의 갈고리(?)야 고마워(?!)